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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Dec 18. 2019

나의 아빠

20년 전에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했지만 이젠 세상 쿨해진 나의 아빠. 

 아빠와 단 둘이 마주 앉은 저녁, 나는 어김없이 그의 레시피를 물려받는다. '소고기 국을 이 냄비로 가득 끓이려면 고기를 얼마나 넣는 거야?', '내가 끓인 육수에서는 무 맛이 너무 많이 나던데, 무를 얼만큼 넣는거야? 양파는 잘라서 넣어, 통으로 넣어?', '왜 내가 끓이면 국물이 맑지가 않지?' 이런 것들을 물어보고 그는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로 자신의 노하우와 노고에 대해 늘어놓는다. 다 커서 따로 가정이 꾸린, 심지어 집안일을 전업으로 하는 딸이 자신이 나고 자란 집 주방의 절대 고수에게 한 수 배우는 시간. 그는 진지하게 말하고 나는 엄숙하게 핸드폰에 그것들을 메모한다.


 그가 왜 요리를 잘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음식을 즐기는 성향을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데다가, 시장 관리인이셨던 아버지 덕에 늘 좋은 식재료가 가득한 집에서 그것들을 먹고 자라서 음식에 대한 경험이랄까 조예랄까 하는 것이 좀 깊은 탓이 아닐까 하고 추정할 뿐이다.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그가 따로 요리를 배우거나 한 적은 없다. 대학생 시절 롯데리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걸 제외하면 요리와 관련된 일을 한 적도 없다. 하지만 쉰을 훌쩍 넘어 예순을 바라보는(맙소사,) 지금까지도 그의 꿈은 자기 식당을 하나 갖는 것. 나는 식당 주인이라는 직업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식당 주인은 요리 실력만큼이나 성실함과 서비스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가진 것은 요리 실력뿐이다.) 그가 언제나 내가 하겠다는 일을 말린 적 없이 뒤에서 지켜봐 주었듯이 나도 그가 하겠다는 것(심지어 꿈이라고 하니..)을 지지하.. 는 척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


 며칠 동안이나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일을 하다 오늘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집에 온 그는 집에 와서 씻자마자 바로 세탁기를 돌려놓았다. (이런 것들이 내가 미국으로 가서도 가족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이유이다. 비록 냉장고와 냉동실 정리는 내 성에 차지 않지만 60년대 생 남자들 중에선 살림을 그럭저럭 잘하는 편이다.) 우리가 저녁을 먹는 동안 빨래가 다 된 세탁기는 띠롱띠롱 알림음을 울렸고 그는 한숨을 쉬며 "아 빨래 널어야 됐었지" 하고 말했다. 난 마침 피곤하지 않고 한가한 저녁시간이어서 내가 빨래를 널어주겠노라 큰 선심을 쓰듯 말하고는 저녁 뒷정리와 설거리, 분리수거를 마친 뒤 빨래를 널었다. 세탁기에서 적당히 축축함이 남아 있는 옷들을 꺼내다 동전 한 개와 사탕 한 개를 발견했고, '빨래하기'에 포함되는 과정들 중 가장 귀찮고 하기 싫은 양말 널기를 하다가 문득 웃음이 난다. 그 커다란 발로 이 조그만 페이크 삭스를 신는다니. 조그맣다고 해도 사실은 엑스라지 사이즈이다(얼마 전 그의 방에서 10개 묶음 양말 포장지를 봤는데 XL라고 쓰여 있었다). 그가 양복에 정장 양말을 신고 다니던 시절이 문득 떠오르고 지금 그가 운동화 속에 신고 다니는 이 살색 페이크 삭스를 손으로 하나하나 뒤집으며 시간이 참 많이 흘렀구나, 많은 것들이 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양말을 자주 안 신는 나와는 달리(가끔 신는다고 하더라도 뒤집어 벗어 놓지 않는다), 그는 매일매일 양말을 신고 외출하는데 심지어 그것들을 죄다 뒤집어 벗어둔다. 보통 자신의 빨래는 자기가 하는 게 우리 집의 룰이라 참견할 생각도 없을뿐더러, 양말을 벗고 세탁하는 방식은 유난히도, 온전히 자신의 선택임을 떠올렸다. 요는 양말이 신발과 바닥에 닿는 바깥 면과, 발에 닿는 안쪽 면 중 어디가 더 더럽다고 여기느냐에 있다. 맨발로 암벽화를 신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지간해서는 발 냄새가 나지 않는 나는 당연히 신발에 닿고 바닥을 딛는 바깥 면이 더럽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어쩌면 발에서 나는 땀을 고스란히 흡수하고, 발 표면의 각질을 다 받아낼 안쪽 면이 더 더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페이크 삭스나 발목양말의 경우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발목이 긴 양말의 경우엔 가끔 뒤집어 빨지 않으면 아무리 세탁을 하더라도 안쪽에 발의 각질을 그대로 남겨둘 수도 있다. 뭐,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의 양말을 뒤집으며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엄마가 그의 옷과 속옷을 살 때는 일관성 있게 거의 레노마나 캘빈클라인 같은 브랜드였던 그의 속옷들이 이제는 내가 알 수 없는 브랜드의 것들로 변해간다. 어쩐지 조금 슬프지만 나의 속옷 역시 이제는 그가 모르는 브랜드의 것들이다. 그러니 그의 팬티가 내가 모르는 브랜드 제품인 것은 슬퍼할 일 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건 그는 내가 아는 (적어도 나와 가까운) 50대 남자들 중에서 가장 요리를 잘하고, 그 외 살림에도 젬병은 아니다. 주머니에서 사탕과 동전을 꺼내지 않고 세탁기에 넣는 것은 나도 가끔 저지르는 일이니 눈 감아줄 만하다. 엄마라면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예쁘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도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의 여자 친구가 가진 안목이 아쉽다 느껴질 때가 많지만(그녀가 나의 아빠를 남자 친구로 선택했다는 점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아빠에게 사다 주는 옷들이.. 때로는 조금 심란하다.) 늘 그렇듯, 그게 보편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자기가 입고 싶은 것을 입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이상 터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 살가운 부녀 사이는 아니기 때문에 적당히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엔 각자의 방에서 또 한동안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그는 내일 치앙마이로 출장을 가서 보름 뒤에 돌아오고 그때 나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겠지만 또 조금은 애써서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보려 하겠지. 매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들이다. 


- 20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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