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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Dec 18. 2019

술에 취해 쓰는 글

너는 이불 속에서 곤히 자고, 나는 이 글을 적는다.

 어느 행복한 날, 시간이 흘러 이 날의 감정을 잊고 싶지 않은 이 순간에 나는 굳이 졸린 눈을 겨우 뜨고,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이 글을 적는다. 글이 쓰여 나가는 모양새를 보니 내 손이 내 생각의 속도를 영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 한 글자를 쓰면 두세 글자를 건너뛰며 문장이 진행된다 해야 할까, 여튼 하고픈 쓰고픈 말은 많은데 타이핑이 그 감정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조급하기만 하다.


 모처럼 너와 함께 보낼 주말에 대한 생각에 혼자 들뜨고 혼자 가라앉으며 너와 다툰 지난밤이 무색하게도 오늘 하루는 참 알차고 벅찼다. 아침에 눈 떠서 거실로 나가자마자 십 오 분 전에 일어난 너와 포옹했고, 그런 너와 함께 우유를 사러 트레이더 조에 갔고, 너는 세심하게도 밀가루가 없는 걸 알아차렸고, 거기에 '념위가 그동안 밀가루를 정말 많이 썼구나'라고 말했고. 맛있는, 너에겐 좀 달고 나에겐 딱 좋은 요거트와 그레놀라, 딸기를 시식했고, 돌아와 함께 꽈배기를 만들고, 요거트를 먹고, 꽈배기를 튀기고, 온갖 시식평과 감탄을 늘어놓으며 꽈배기를 먹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모처럼 포포를 타고 오래 달려서 간 버디고에서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했고, 난 오랜만에 약간의 성취감과 함께 볼더링의 즐거움을 느끼고. 사람들과 함께 옛날 우리가 데이트하던 호프집들을 떠올리게 하는 치킨집에서 치맥을 먹었다. 함께 장을 보고, 집에 와 요리를 준비하고 손님을 맞고.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술도 마셨다. 오늘 하루는 너와 내가 함께해 온, 함께하는 시간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2주 반만 있으면 또다시 한 달 반을 떨어져 있어야 해서 그런 건지, 요즘 유난히도 안쓰러울 때가 많은 너와 모처럼 길게 보내는 주말이라 그런 것뿐인지. 여하튼 포포가 나오길 기다리며 너와 마주 보았던 1-2분 남짓한 그 시간도 왜인지 인상 깊게 남았다. 


 하루 종일 피곤했을 네가 설거지와 주방 정리까지 마친 걸 보고는 고마움과 함께 안도감, 안쓰러움 같은 게 느껴졌다. 유난스럽게도 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겹쳐졌던 오늘. 네 목덜미부터 발끝까지 조물조물 주무르는데, 나의 손 힘이 세져서 그런 건지 네 몸 구석구석이 많이 뭉친 건지, 아니면 네 배려였는지.. 난 힘을 많이 주지 않았는데도 넌 무척 시원하다고 말해줬다. 엎드려 있던 너의 목덜미, 어깨, 등과 허리, 상완, 종아리, 발목과 발을 주무르고 널 바로 눕힌 다음 네 전완을 주물렀는데 넌 얕은 잠에 빠졌다가도 자꾸 깨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 기분은 잘 알지. 너무 나른하고 편안해서 자꾸 잠에 빠지는데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겨우 정신 차리고 말을 해보는 그 기분. 그렇지만 나는 네가 푹 자길 바랬다. 그래서 네 전완을 주무르다가 네가 이를 딱딱 부딪혔을 때 정말 이상하게도 맘이 편했다. 네가 깊은 잠에 빠지는 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게 네 왼 팔을 클라우디오 속으로 넣어주고 네 오른쪽으로 갔다. 


201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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