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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Jul 23. 2020

남편과 대화하려고 결혼했다.

 오늘 못 한 이야기는 얼른 자고 일어나서 해야지. 

녀미가 코스트코를 같이 가면 녀미가 얻는 이득은 뭐야??

응? 

 

로메인 상추를 사러 코스트코를 가야 했던 어느 오후, 조금 있다가 갈까 아님 지금 시간도 살짝 떠서 뭘 하지도 못하는데 지금 갈까 고민하다 '조금 있다 가기엔 저녁 준비할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 후딱 갔다 오자' 하고 결정을 내렸다. 장바구니와 마스크를 챙기며 나갈 준비를 하는데 남편이 말했다. "근데 녀미가 코스트코를 같이 가면 녀미가 얻는 이득은 뭐야??" 아마도 이미 다녀온 다른 마트에서 사 온 고기며 다른 것들을 정리하며 집에 있어도 될 텐데 그냥 자신을 보내지 않고 같이 가는 이유에 대해 물은 것일 테다. 


남편의 물음에 나도 별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어서 "음... 음. 로메인 사와~ 하고 시키지 않는다는 점?? 그렇게 너 혼자 보내면 심부름시키는 것 같잖아" 하고 대답하며 상황은 대충 지나갔다. 차에 타서 큰길을 달리기 시작했을 때, 난 아까 남편에게 하던 어떤 영화 이야기를 이어하려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남편에게 말했다. "이거지, 내가 코스트코를 같이 가면 얻는 이득은 너랑 대화할 시간이 생기는 거!" 남편이 "그것도 그러네" 하고 답했다.


남편과 만나 사귀기 시작한 게 2010년 봄. 올해로 딱 만 10년이 되었고 우린 벌써 11년 차 연인이자 4년 차 부부이다. 내가 왜 남편과 사귀기 시작했고 결혼까지 했는지에 대해 답하자면 정말 난 '남편과 대화하기 위해서' 만나고, 결혼했다. 스무 살의 봄, 잠시 친구였던 시절부터 이 사람은 기가 막히게 죽이 잘 맞았다. 함께 별을 보러 산청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서의 네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어디서, 어떤 주제로 수다를 떨어도 지루함이 없던 사람. 내가 '아' 하면 그가 '어' 하고 다시 내가 '이' 하고 남편이 '다' 하는 것 같은 물 흐르는 듯한 대화. (아, 추억의 무한도전....)


심지어 갓 만난 스무 살 무렵에는 네이트온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며 온갖 드립과 개그도 많이 쳤는데 그 대화의 어느 순간순간도 잊지 않고 싶어서 모든 대화를 다 저장해 두기도 했다. 아마 지금은 낯간지러워서 못 볼 것 같긴 하지만. (둘 다 인터넷을 엄청나게 하면서 온갖 인터넷 유우머-와 밈들을 알고 있는 자들로서, 지난 10년 넘는 시간 동안 우리의 대화에도 온갖 드립들의 유구한 역사가 존재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것들이 잊혀지고, 또는 여전히 쓰이지만 그 유래를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혼을 한 지금은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이 워낙 길고 집에서 각자 할 일을 하느라 좀 성의 없이 대화를 할 때도 있고,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몇 시간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전히 우린 대화가 많은 사이이다. 어쩌다 한 가지 주제가 등장하면 거기서 각자의 생각에 대해 충분히 말하고, 거기서 뻗어간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한참 말한다. 말하는 도중 드립이나 개그를 칠 상황이 있으면 또 그걸 넘어가지 않고 칠 건 쳐야 한다. 그리고 잠시 그 드립의 기원에 대해 잠시 되짚어보았다가 또 원래 주제로 돌아와 말을 하고, 그러다 나온 표현이나 단어에 대해 고찰한다. 단어의 유래나 다른 쓰임에 대해 유추하거나 검색하기도 했다가 다시 하던 말을 (애써 기억해내서) 한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고 각자 시계를 보며 '아이고, 뭐했다고 벌써 열두 시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시대를 산, 그리고 같은 정서와 문화를 공유하는 우리에겐 아주 사소한 것들도 아주 긴 대화를 할 만한 소재가 된다. 이를테면 우리가 6학년이던 2003년의 사회과 부도 표지가 월드컵 거리응원 사진이었던 것을 가지고 이야기가 시작되면 사회과 부도에 실린 온갖 통계와 지도와 그래프 등등이 얼마나 흥미로웠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내가 한국에 가면 사회과 부도를 사오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다가 학년 초에 교과서를 받는 일, 교과서를 잃어버려서 사야 하면 진주의 어느 큰 서점을 갔는지에 대해. 내가 어린 시절 사랑했던 책들에 대해, 어린시절의 책 가격과 만화책 대여점의 대여 가격과 연체료 등 시시콜콜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두어시간이 훌쩍 흐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각각 굉장한 수다쟁이인 것도 아니다. 그냥 보통사람 정도의 수다력을 가진 편인데 (오히려 타인과의 너무 긴 대화는 피곤해하는 편) 둘이 같이 있으며 나누는 대화는 거의 하루 온종일 이어지고, 생각보다 아주 많은 주제에 대해 그런 이야기들을 한다. 


요 며칠 남편은 아주 바쁘다. 아침부터 늦은 밤, 새벽까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난 이해하지도 못할 화면을 보며 마우스를 움직이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난 그다지 바쁘지 않아서 한량처럼 인터넷 페이지들만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남편한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꾹 참고 '나중에 밥 먹을 때 말해야지' 하고 캡쳐해 두거나 메모장에 적어두곤 하지만 참지 못하고 열심히 집중하고 있는 남편을 불러 말을 꺼내거나 메세지로 링크나 사진을 툭 보내버릴 때가 많기도 한다. 착한 남편은 아마 최대한의 성의를 발휘해서 답해주고 난 그렇게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걸로 소소하게 만족하며 또 시간이 흘러간다. 


새벽 세시가 넘어 침대에 함께 누우면서, 남편은 고작 다섯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야 하는 와중에도 문득 생각난 '손에 전기 오르게 하기'에 대해 '나이를 먹을수록 혈행은 점점 나빠지는데, 나이만큼 잼잼 할 것이 아니라 나이와 반비례하게 잼잼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내가 일어나 앉아 남편 손을 주무르고, 때리고, 손 끝을 잡아 뜯고, 잼잼을 스무 번(나이만큼 서른 번은 너무 많으니 스무 번으로 타협) 시키고, '호' 데운 손가락을 빙글빙글 그의 손바닥 위에 돌려 '전기 왔어? 왔어?' 묻고 다시 누웠다. 잠잘 시간이 다섯 시간에서 자꾸자꾸 줄어드는데도 나의 그런 짓을 웃으며 받아준 남편에게 새삼 고맙다. 


그렇게 온종일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도 '못한 이야기는 자고 일어나서 해야지' 하며 잠에 든다. 

얼른 남편의 바쁜 일이 끝나기를. 그래서 더욱 소소한 잡담을 맘껏 나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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