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를 놓치면 영락없이 시들고 쪼그라드는 말들을 재빨리 거두는 일
어떤 글을 읽거나 장면을 보는 동안, 또는 늘 다니는 길을 무방비 상태로 걷는 동안 내 안에 어떤 문장이나 단어 같은 것들이 고이곤 하는데 보리를 내 배 위에 올려두고 곁에 있던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펴서 읽던 오늘 오후도 그랬다. 그런 것들은 잠시 고였을 때 좀 더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느샌가 다시 스르륵 흘러 사라져 버린다. 그때 잡아두지 않고 흘려보내면 나중에 다시 책상에 앉아 '아까 잠깐 좋은 생각이 났던 것 같은데' 하고 되짚어 보려고 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까 살짝 떠올랐던 적당하거나 절묘한 문장은 온데간데없고 진부하고 어설픈 생각만 남아 있다.
테라스에는 꽃가지가 다 잘리고 푸른 잎만 남은 수국이 있다. 꽃망울이 자라고 꽃잎이 커지고 아름다운 푸른빛으로 변해가는 초여름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나가서 꽃을 봤다. 그러다 더 이상 꽃잎이 자라지 않고, 더 푸르러지지 않고 성실하게 물을 주어도 꽃잎이 시드는 기미가 보이면 지체 없이 꽃가지를 잘라주어야 한다. 그때 꽃가지를 잘라 그늘지고 건조한 곳에 걸어두면 활짝 핀 모습 그대로 잘 마른 수국 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더워지는 이런 시기에 꽃가지 자르는 것을 하루 이틀만 미루어도 꽃잎은 영락없이 쪼그라든다. 그때는 뒤늦게 꽃가지를 잘라 말려봐야 꽃이 활짝 핀 상태로 마르는 것이 아니라 꽃잎이 축 쳐지며 쪼글쪼글하게 마른다. 물론 수국이기에, 그것 역시 그것대로 아름답긴 하다. 하지만 활짝 피어 풍성했던 수국 꽃송이를 되새기기엔 조금 부족하다.
수국은 수국이기에 시기를 놓쳐 말린 꽃가지도 아름답지만, 내 안에 고이는 글들은 대체로 그렇지가 못하다. 수국 꽃가지는 이러나저러나 잘라야 하기에 조금 늦더라도, 쪼글거리더라도 잘 말려져 우리 집의 흰 벽을 장식하지만 시기를 놓친 글들은 대부분 수확되지 못하고 내 안 어디선가 부서져 날려가 버린다. 글이 고이는 동안 틈틈이 들여다보고 조금씩 손보다가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 얼른 적어두는 것이 좋다.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수국 꽃송이처럼 아름답게 남는 것은 아니라 다시는 펼쳐보지 않는, 기록으로서의 가치만을 가진 문장들의 나열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선 적어두는 편이 낫다. 어떤 글은 들여다보거나 돌볼 틈도 없이 금방 시들기 시작하니 더 서둘러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잘 알지만 나의 게으름은 내가 그 순간들을 붙잡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사소한 말들을 놓치지 않고 꼬박꼬박 적을 수 있다면 브런치가 내 계정의 소유인인 나를 '작가'라고 칭할 때에도 좀 덜 부끄럽지 않을까. 물론 그저 '매일 쓰는 사람'을 작가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