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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Jan 25. 2022

힘껏 뿌리를 뻗고 새순을 올리며

적게 죽이고 많이 배우고 싶은 5년차 식물집사

'야행성'이라는 단어를 배우기도 전부터 야행성 인간이었고, 여전히 창작에 대한 욕구가 강한 날에는 밤을 기다려 작업하는 사람이지만 어릴 때에 비하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날들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특히 겨울에는 동쪽으로 난 창을 통해 (한국의 3중 유리 창문과는 달리) 얇은 홑겹의 유리만을 통과한 아침 햇살이 거실 깊숙이 들어오는데 그 아래 고양이들과 누워있으면 꽤 뜨거운 햇빛이 온몸에 닿는 기분이 겨울 이불의 포근함 만큼이나 기분이 좋다. 그래서 다음 날 일기 예보를 보고 아침부터 해가 쨍쨍하다고 하면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도 조금 더 가뿐한 마음으로 이불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방문을 열면 안방보다 따스한 거실 공기와 털 찐 겨울 고양이들이 날 맞이해 준다는 사실이 가을과 겨울에는 큰 위안이 된다. 


사실 이렇게 아침에 대해 예찬을 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아니다. 오히려 내가 밤의 시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밤이다. 무언가를 만들거나 정리하는 밤도 좋지만 요즘 자주 느끼는 밤의 행복은 바로 우리 집의 실내 식물들을 돌보는 데에서 온다. 

처음에는 마트에서 사 온 바질과 수국 화분으로 시작해, 한동안은 많은 채소와 허브 모종을 키우고, 죽이고, 수확의 기쁨을 경험하고, 씨앗을 채종해 다음 해에 파종하고, 또 죽이거나 무성하게 키워내거나 온갖 일들을 겪었다. 핀셋으로 나비 애벌레를 잡아 죽이고, 지렁이를 납치해 번식시켜 분변토를 얻기도 하고, 팔랑팔랑 예쁘게 (하지만 또 알을 낳으러) 날아온 나비를 내쫓고, 끊임없이 로즈마리와 장미, 수국을 데려왔다가 죽였다가 하면서 어느덧 나도 5년 차 식물 집사가 되었다. 


종종 찾아오는 조증 시기가 봄과 초여름 사이에 걸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침마다 눈이 번쩍 뜨여서 테라스에 나가 소중한 내 풀과 꽃들에게 물을 주고, 한참을 바라보다 벌레도 조금 잡고, 또 한참을 바라보며 커피도 마시고 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엘에이의 봄은 꽤 길고 더위도 늦게 찾아오긴 하지만 그래도 8월이 되면 한 번쯤 찾아오는 더위에 풀들이 맥을 못 추면 나도 안절부절 못 하게 되고, 또 이곳의 늦봄부터 초겨울은 어찌나 건조한지, 하루 이틀 정도만 물 주기를 놓쳐도 흙이 바짝 말라버려 흙이 물을 머금지 않게 되는 일도 잦았다. 예쁜 토분에 식물을 심으면 너무너무 보기 좋을 것 같은데, 빨래를 해서 널면 두꺼운 청바지도 한 시간이면 바짝 마르는 이 동네의 여름은 토분과 흙과 식물도 바짝바짝 말렸다. 토분에 담긴 아이들은 거의 물에 담가놓다시피 해야 여름을 견뎠다. 


겨울에도 기운이 많이 떨어지진 않지만 그래도 냉해를 입는 애들이 종종 있어 자다가 일어나 화분을 들여오기도 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화분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테라스로 뛰쳐나가기도 했다. 일 년 내내 대체로 건조하고 연교차가 작다는 건 인간 기준의, 특히 혹독한 한국의 기후에서 자란 나에게는 엄청난 장점이었지만 식물들에겐 그 나름의 고충이 있는 듯했다. 그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테라스만 식물로 꽉꽉 채우던 나도 슬슬 실내 식물로 눈을 돌렸다. 


시작은 몬스테라였다. 한국에는 2016~7년 즈음부터 몬스테라 붐이 일어서 어디서나 쉽게 만나는 식물이 되었지만 그런 유행이 딱 '1년 정도 느린' 미국 답게, 여기서는 2019년 정도가 되어서야, 제법 큰 널서리에서 몬스테라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조금 큰 마트 체인에서는 늘 식물 화분이나 꽃다발을 함께 판매하는데 그런 곳에서는 2021년이 되어서야 쉽게 몬스테라를 볼 수 있게 된 정도니 더 늦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나도 2019년에 약간 수소문하다시피 해서 찾아간 널서리에서 몬스테라를 데려왔는데 그렇게 데려온 몬스테라는 한동안은 너무 쑥쑥 자라더니, 비좁은 화분 속이 버거웠는지 아니면 여름 오후 늦게 테라스로 들어오는 직광이나 건조한 바람이 힘들었는지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때 분갈이를 하며 포기를 나누고 집안 여기저기에 물꽂이 한 몬스테라를 두었는데 그것 만으로도 집의 분위기가 꽤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하나, 둘 실내 식물을 들이고 베란다에서 힘겨워하는 애들도 집 안으로 데려오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지금 집 안에 있는 화분이 40여 개, 테라스에 있는 것들이 여전히 크고 작게 2-30여 개. 겨울이라 이 정도지 봄이 되면 수많은 모종 화분과, 거듭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또 들일 허브 화분과, 이렇게 저렇게 온갖 사정으로 우리 집 식구가 될 것들까지 합치면 한창때 돌봐야 할 화분은 100개가 넘는다. 손이 많이 가고 마음도 많이 쓰이는 일이지만 그만큼 식물로부터 얻는 위안과 기쁨도 크다. 


오늘만 해도 운동을 나서며 테라스를 둘러보다 새로 돋아난 고춧잎들을 보고 마음이 얼마나 설레던지. 2019년에 씨를 구입해 한번 파종했다 전멸시키고 2020년 봄에 다시 시작해 고춧잎을 실컷 따 먹고도 파란 고추 두어 개와 빨갛게 익은 고추 대여섯 개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러고 살짝 방치하다시피 겨울을 보냈는데 2021년에 다시 새순을 올리더니 잎도 무성하고 열매도 많이 열려서 여름과 가을 내내 푸른 고춧잎 구경하고 매일 한두 개의 고추를 따고 말리며 보냈다. 덕분에 한동안 마트에서 세라노 고추를 사지 않아도 되었고 엘에이의 가을볕에 빨갛게 익고 바짝 마른 건고추도 두어줌 얻게 되었다. 날이 따뜻한 곳에서는 고추도 여러해살이 식물이라더니, 정말 그렇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겨울이 시작될 무렵 일찌감치 고춧잎을 정리하고 줄기도 댕강 잘라두었는데 바로 오늘 고추에 다시 새순이 잔뜩 자라난 걸 본 것이다. 아직 겨울은 한참이나 남았는데 고추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봄을 준비하는 게 안쓰럽고도 기특하다. 아니 나 왜 이렇게 감성적이 된 거지.......


여하튼 어떤 날에는 우리 집 두 고양이 보리구름 보다도 식물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아 보리구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오늘 밤도 빙수가 잠자리에 들고 나서 나는 부엌과 거실을 오가며 화분에 손을 찔러 넣어 확인하고, 물을 주고, 잎을 정리하고, 방향을 돌려놓으며 시간을 보냈다. 빙수도, 고양이들도 잠자고 풀에게 집중하며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이 조금 쓸쓸하고 많이 충만하다. 


기복 없이 무탈하게 커주며 개체수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은월이나 엔조이 스킨답서스도, 처음에는 슈퍼 개복치였다가 이젠 우리 집의 든든한 다산왕으로 거듭난 브레이니아도, 내 실수로 거의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가 살아나 한참 회복하고 성장하고 있는 필레아페페도, 내 욕심으로 언제나 고생하는 나만의 최애 다이콘드라도, 암장에서 한 포기 얻어와서 겨우 살려만 뒀다가 이제 성장세를 보이는 셀렘도, 뿌리가 많이 드러나고 상했다고 반값에 파는 걸 데려와 이제 안정기에 들어선 듯한 필로덴드론 버킨, 트레이더 조에서 데려올 땐 수준은 공주님이었는데 어느새 아마존 여전사처럼 자라난 히메 몬스테라, 빙수가 맥주 사러 가서 이벤트로 받아온 달개비와 칼라데아 마란타......


하나하나 다 쓰고 싶은데 워낙 이름을 잘 못 외우는 나라서 이름들도 가물가물하고 무엇보다도 이 새벽에 70개 화분에 대해 다 쓰자니 이러다 아침이 될 것 같다. 여하튼 우리 집에 와 준, 와서 나로 인해 조금(?) 고생하고 나를 조금 고생시키고 많이 기쁘게 해 준 식물들에게 모두 고맙다. 2022년의 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힘내라고, 함께 좋은 봄날을 맞이하자고 말하고 싶다. 뿌리를 힘껏 뻗고 새순을 뿅뿅 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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