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철 트리오 -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

by Loc
2025_YUNSEOKCHEOLTRIO.jpg



지난 10월부터 일요일까지 반납할 정도로 업무가 바빠지면서 음악, 게임, 독서 등 모든 여가 활동이 멈춰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이닐 리뷰는 커녕 용돈 쓸 시간도 없이 통장 잔고만 차곡차곡 쌓여갔고, 이대로 올해를 끝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고른 올해의 마지막 바이닐이 <윤석철 트리오 -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 입니다. 아마 올해 초였을 겁니다. 해외에는 빌 에반스를 시작으로 에디 히긴스, 빌 찰랩 등 여러 재즈 트리오가 있는데 한국엔 없나? 라는 생각으로, 국내 재즈 트리오는 뭐가 있나 찾아보다가 의외로 금방 눈에 들어온 이름이 윤석철 트리오였습니다. 당시에는 자금 사정과 우선순위 때문에 위시리스트에만 담아두었으나 별것 아닌 작은 계기를 핑계 삼아 해가 넘어가기 전 급하게 구매하게 됐습니다.





♪ Sonny never gets blue (feat. 박기훈, 이삼수, Q the Trumpet)

손흥민 선수에게 헌정하는 곡이라는 배경을 알고 들으니 그 의미가 더 색다르게 다가옵니다.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비는 열정적인 Sonny의 모습이 화려한 트럼펫 사운드를 통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작곡가의 의도가 담겼겠지만 제목에서 소니 클락이나 소니 롤린스 같은 재즈 거장들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단순히 스포츠 스타를 찬양하는 것을 넘어 재즈의 전통적인 유산과 현대적인 영웅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세련된 오프닝 곡입니다.



♪ 루틴 없는 게 루틴

바로 이번 앨범을 구매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곡이자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이 가는 트랙입니다. MBC 라디오 '이상순의 완벽한 하루' 에서 3부 CM송으로 쓰이면서 일반 대중들에게도 인지도를 얻지 않았을까 생각 되는데, CM송 마지막에 나오는 윤석철의 목소리가 일상의 오후 시간대의 나른함과 친근함을 동시에 전해줍니다.

일정한 리듬이 꽤 길게 반복되는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곡 전개는 전혀 지루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복 속에 몸을 맡기고 고개를 까딱이게 만드는 묘한 중독성이 있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 자체가 하나의 루틴이라는 역설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지친 일상에 작은 위로를 건네는 기분입니다.



♪ 쇼츠하이

쇼츠하이는 앨범 안에서도 가장 낯설고, 가장 실험적인 인상을 줍니다. 배경지식 없이 들었다면 일본 아티스트의 곡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기타 연주는 어색한 듯 시작되지만, 그 어색함이 의도된 불안정으로 이어지며 곡 전체의 긴장을 만듭니다. 특히 곡 처음부터 끝까지 왼손에서 반복되는 단 하나의 음이 인상적입니다. 이 반복음은 자칫 불협화음처럼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곡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묵직하게 잡히는 느낌입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8bit 칩튠 사운드가 등장하고, 템포가 점점 빨라지면서 제목인 ‘Shorts High’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짧은 영상에 중독된 상태, 혹은 순간적인 고조감, ‘high’라는 단어가 가진 이중적인 의미가 음악적으로 풀려나는 순간입니다.



♪ 종이비행기

제목을 날아가는 종이비행기의 모습을 보고 지었다기엔 너무 잔잔한 곡입니다. 제목이 생략된 느낌입니다. 아마도 ‘종이비행기를 접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나’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가을이 오기 직전의 늦은 오후, 현관문을 열어둔 좁은 마루에 앉아 지난달 달력으로 접을지, 예쁜 색종이로 접을지 고민하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곧 저녁 먹을 거니까 손 씻어.”라는 어머니의 말에 “이것만 날리고 들어올게요.” 하고 뛰어나가고,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버린 종이비행기. 잘 날아갔다는 기쁨과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씁쓸함을 안고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과 더 잔잔한 드럼 브러시가 그 아련함을 오래 붙잡아줍니다.



♪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

앨범과 같은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도 타이틀곡이 아니라는 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인지 이 곡은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앨범 전체를 정리하는 역할에 가깝습니다. 늦여름의 공기, 아직 식지 않은 바다의 습기 같은 감각이 베이스를 중심으로 깔려 있습니다. 완전히 밝지도, 그렇다고 우울하지도 않은 애매한 온도가 곡 전반을 지배합니다. 곡이 후반으로 갈수록 피아노, 드럼, 베이스 모두 점점 화려해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여름의 마지막 불꽃놀이 같습니다.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선을 떼기 어려운 순간입니다. 그리고 곡은 페이드아웃으로 조용히 물러납니다. 확실한 결말을 주기보다는, 여운을 남긴 채 여름을 조금 더 붙잡아두는 방식입니다. 마지막 트랙인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제목 그대로 “아직 끝내고 싶지 않은 시간”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글 서두에 한국 재즈 아티스트를 찾다가 알게된 앨범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 그러다보니 이 앨범을 쭉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재즈 시장에 대한 생각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재즈 애호가는 분명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글 위키사이트조차 2022년 이후 업데이트가 없었습니다. 나름 어린 시절에는 음악을 했던 본인조차도 데뷔가 2007년인 이런 실력파 아티스트를 알게 된 게 2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아하면서도 놀라웠습니다.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닿을 수 있는 경로 자체가 워낙 제한적인 탓이 더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여름은 아직 안 끝났어>를 들으며 느꼈던 그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연주들은, 어쩌면 척박한 국내 재즈 시장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아티스트의 투쟁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앨범은 제목처럼 무언가를 억지로 끝내려 하지 않습니다. 지나간 계절을 붙잡지도 않고, 그렇다고 단호하게 보내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조금 더 곁에 두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연말에 이 음반 고른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였을 것입니다. 바쁘게 흘러간 한 해를 정리하기보다는, “그래도 이런 순간은 남아 있다”고 스스로에게 확인하는 느낌입니다. 바쁜 일상에 치여 여유를 잃어버렸던 저에게 이 음반이 단순한 소장품 이상의 위로가 되어주었듯, 더 많은 분들이 윤석철 트리오의 음악을 통해 재즈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제가 모르는 국내 재즈 아티스트들은 분명 더 많을 테고, 그런 아티스트들이 조금만 더 자연스럽게 소개될 수 있다면 듣는 사람도 훨씬 늘어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이 앨범만큼은, 올해를 이렇게 마무리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줬습니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그리고 생각보다 오래 남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LP] 안토니오 아돌포 - Virala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