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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거진 농담 May 28. 2021

리틀 포레스트를 찾는 건 사실 어려워

귀촌에세이 - 사랑과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4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


출근길

옥과 정류장에서 출발하는 곡성 방면 버스는 출발 후 10분 이내에 집 앞 정류장에 도착한다. 그날 버스 승객의 연령층과 기사님의 컨디션에 따라 도착 시간은 달라질 수 있으니 무조건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것이 답이다. 부랴부랴 천 원짜리 지폐 하나를 챙겨 정류장으로 나선다. 기다리는 동안 이어폰을 꽂고 오늘의 노래를 선곡하면 출근 준비 완료. (아침에게 말해 oh! 오늘이 좋을 것 같아) 저 멀리 하늘색 버스가 다가오는 게 보이면 손을 흔들어주는 매너가 필요하다. 얼마나 오래 가든 천 원이면 탈 수 있는 농촌의 버스는 장이 열리는 날이면 장에 가는 어르신들로 만원이다. 그러니 다리 튼튼한 젊은이들은 센스 있게 가장 뒷자리로 가시라.


곡성 터미널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크게 좌회전하거나 우회전하는 일 없이 쭉 뻗은 도로를 달린다. 덜컹거리며 달려가는 버스 창밖으로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펼쳐진 논밭으로는 계절의 변화가 보인다. 요즘엔 바람 따라 소풀이 이리저리 흔들리던 밭은 멀끔히 이발하고 논농사를 준비하는 계절이다. 물 댄 논에는 가끔 두루미인지 뭔지 모를 새들이 날아들고, 새들만큼 허리 굽은 농부가 논두렁을 따라 걷는 풍경이 보인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내가 사는 지역의 풍경이 어떤지, 이 고장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그제야 보인다.


출렁거리는 버스 리듬에 따라 몸을 내맡기다 보면 절로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든다. 아침을 안 먹었더니 배가 고프네. 오늘 점심은 뭘 먹으면 좋을까. 이따 미팅에서는 어떤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할까. 집 계약을 연장해야 하는데. 내년엔 어쩌지. 5년 뒤에는 다른 나라에서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데 코로나가 지속될까··· 다행히 호호할머니가 되기 전에 터미널에 도착한다. 터미널에서 회사까지는 다시 걸어서 20분. 읍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저마다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채소 모종을 내놓은 육묘 가게, 커피 내리는 카페 사장님, 아침부터 부지런히 장을 보고 벤치에 앉아 잠시 쉬는 할머니들, 새롭게 리모델링 중인 점포···. 이제는 제법 익숙한 출근길이다.



퇴근길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퇴근길. 그래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 감독 임순례)》의 혜원(김태리 분)은 여전히 그 시골집에 살고 있을까? 어젯밤 잠들기 전에 틀어놓았던 영화 속 장면이 머리에 스친다. 혜원은 쌀과 사과가 유명한 작은 시골 마을 미성리(실제 촬영지는 경상북도 군위군 미송리 일대라고 한다)에서 태어나 ‘인서울’했지만, 지난한 고시 공부와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관계에 지쳐 도망치듯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혜원은 밭을 일구고 자신에게 먹일 밥을 삼시 세끼 지으며 사계절을 보낸다. 영화의 정점은 혜원이 앞으로의 삶을 어디에서 꾸릴지 선택하는 과정에 있다. 그 선택을 위해 일 년이라는 시간을 고향에서 보낸 혜원이기에, 여전히 시골집에서 감자빵을 굽고 막걸리를 담그며 후회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몇 명의 손님과 그들 하루의 고단함을 실은 막차가 출발한다.《리틀 포레스트》만 보고 시골에 가야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은 없겠지. 영화는 영화다. 도어락도 방충망도 없이 홑겹 유리창으로 된 혜원네 현관문은 벌레의 습격을 받기에 딱 좋고, 꽃잎 파스타와 직접 말린 곶감 대신 편의점에서 점심 한 끼를 해결하는 일이 더 많다. 빨랫비누가 똑 떨어져 자전거를 타고 한참을 달려 읍내 슈퍼로 나가는 일은 없도록 미리미리 로켓배송으로 장을 봐두는 것이 현명하다. (앗, 이번 정류장에서 내려야 한다. 시골 버스는 이번 정류장만 시크하게 언급하고 다음 정류장은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가까워서 조금만 걸으면 되는데 가끔은 너무 어두워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야 한다. 그만큼 어두운 곳이어서일까, 자동으로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면 별이 쏟아질 듯하다. 처음 곡성으로 와도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은 별이 무수히 많이 뜬 곡성의 밤하늘을 처음 보았을 때였다. 조도가 높고 소란스러운 도시의 밤에 지치고, 숨만 쉬어도 돈이 빠져나가는 생활에 고달플 무렵이라 더욱 그랬다. 잠시 벗어나서 이렇게 조용한 곳에 살면 뭔가 쉬어가는 기분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건강도 챙기고 나 자신을 좀 돌보며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삶의 터전을 옮겨보자 결심했다. 요컨대 공간을 옮기면 그 공간에 따라 나의 삶도 바뀔 거라는 생각,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같은 것이 그때의 나에게 있었다.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

어쩌면 혜원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게 아녔을까.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평생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바쁘게 요리하고 씨를 뿌리는 혜원에게 재하가 어느 날 넌지시 묻는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서 문제가 해결돼?” 그 질문에 정곡을 찔린 혜원은 선택해야 할 시점이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중요한 것은 나만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나가는 일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잘 구별하고 이를 해가는 일이다. 공간은 내 삶의 많은 것을 결정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내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든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온전히 나만의 몫이다. 재하는 아마도 너만의 것을 하고 있느냐 물었을 것이고, 혜원은 엄마의 숲에서 벗어나 자신의 것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일상에 쫓겨 살다 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 삶의 터전을 옮겨 왔는지를 잊어버릴 때가 많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런 것보다는 당장 해야 하는 일에 파묻혀 출퇴근길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가끔, 그러니까 과속방지턱을 만날 때면 버스가 위아래로 덜컹거리는 순간처럼,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가는 순간에는 문득 스스로 묻게 된다. 혜원의 엄마에게 자연과 요리 그리고 혜원에 대한 사랑이 작은 숲이었다면, 오로지 나 혼자만의 힘으로 가꿔야 할 그리고 그 자체로 나의 위안이 되어줄 작은 숲은 어딜지.


나도 나만의 작은 숲을 찾아야겠다. 내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든,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나의 뿌리, 나의 힘, 나의 쉼. 그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고, 나에게서 출발해 나에게로 도착하는 일일 테다. 오늘 눈을 감으면 내일 다시 눈을 뜰 것이고, 출근과 퇴근으로 이뤄진 하루가 후딱 지나갈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므로. 그러니 내일도 부지런히 버스 정류장으로 나서기 위해 오늘의 잠을 청한다!



글 | 제소윤 

사진 | 제소윤, 조소은



본 콘텐츠는 웹매거진 농담(nongdam.kr) 4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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