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가고 싶을 때가 아니면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드는데, 새벽녘 아기가 몸을 꿈틀거리기만 해도 눈이 번쩍 떠진다. 몸을 일으키는 데까지 로딩이 좀 걸리긴 하지만,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아이가 울기 전에 재빠르게 분유를 타는 능력은 엄마가 얻고 나서 생긴 근육이다.
아이를 보면서 일까지 하려면 두 배의 튼튼한 근육이 필요하다.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쪼개서 중요한 일부터 해야 한다. 그날 해야 할 일을 미리 정리해두거나 머릿속으로 그려놓지 않으면 아까운 시간을 놓치기 때문에 미리 생각해두고 시간이 생기면 재빠르게 처리한다. 그날 할 일을 딱 한두 개만 정하고 그마저도 아기가 낮잠을 안 자는 등의 변수가 생기면 포기할 수 있는 건 빠르게 포기한다.
포기를 빨리 하지 않으면 일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를 보면서도 일 생각이 나고 아이가 빨리 자지 않으면 감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힘들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사는 거지?'라는 자괴감까지 생기기 때문에 오늘 못할 것 같으면 빠르게 포기하거나 다음으로 미룬다. 아니면 새벽에 일어났을 때 밀린 일을 한다.
바쁘고 부지런하게 사는 성격은 아닌데, 아이를 낳고 사용 가능한 시간이 제한적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일을 취사선택하고, 빠르게 일하는 능력이 생겼다. 하루 걸려서 할 일도 한두 시간 빠르게 집중해서 끝낸다. 나에게 어디서 이런 능력이 생겼지? 가끔은 신기하다.
(물통을 보여주며) 이 물이 투명한 게 목표가 아니라 일단 물을 채우는 게 목표인 거예요. 마감 전에 물을 채워서 일단 뚜껑을 닫는 게 중요한 거죠. 퀄리티에 집중하기보다는 끝내는 데 집중하려고 했어요.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죠. 그렇게 하다 보면 그 다음번에는 완성도가 점점 높아지더라고요.
조현주, <내 일을 지키고 싶은 엄마를 위한 안내서>, 마티포포, 92쪽
둘째를 출산한 후 (아직은) 몸이 건강해서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 그래도 욕심 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선까지만 하기로 했다. 아직은 아이를 돌보고 눈 마주칠 시간이 더 필요할 때니까.
임신과 육아를 하는 시간이 엄마에게는 희생하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예전만큼 자유롭게 일할 수 없는 대신 아이를 보면서 생각하는 시간이 생겼다. 아이를 안고 먹이고 재우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할까, 어떤 걸 배울까 등을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것이다.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예전처럼 앞만 보고 눈앞에 닥친 일들에만 급급해 살지 않았을까 싶다.
갓 태어난 아기도 쑥쑥 크지만, 엄마도 함께 자란다. 내 한계는 여기까지일까 답답한 적이 있었는데, 환경이 바뀌니 살아남기 위해 뭐든 해내는 것을 보며 아직 파내지 못한 능력들이 많은 것 같다. 변화를 즐기는 성격은 아닌데 새로운 길을 가는 게 설렌다. 나에게 새로운 눈을 열어준 아이들에게 감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