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닳지 않는 기다림의 총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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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판 위의 손끝이 달빛처럼 떨렸다.

첫 장단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허공이 진동하고, 저 먼 들녘을 지나 산등성이의 나무 뿌리를 깨웠다.

북채 한 번의 내리침마다 과거와 현재가 마구 뒤섞여 혼재했고, 소리꾼의 목소리가 그 틈새를 연결했다.

덩- 하는 소리와 동시에 그 목소리는 춘향이라는 어떤 여인의 것이 되었다.

이별의 밤을 흠뻑 눈물로 지새우며 임을 기다리고, 끝끝내 사랑한 여인이 되었다.

그녀는 지긋이 우리를 바라보고,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이별이 된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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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은 아버지를 따라 남원을 떠나야만 했던 이도령과 눈물로 작별했다고 말한다.

죽음이 있어야 삶이 있듯이, 이별이 있어야 사랑은 제 빛을 발한다.

하나만을 사랑하기에는 생이 너무 길고 길어서, 우리는 사랑을 찾아 부지런히 길을 나선다.

서울로 바삐 상경한 사람들로 인해, 테마파크의 모노레일은 제 기능을 다할 방법이 없어져 멈춰섰다.

서쪽의 저편으로 떠나버린 옛 기차는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떠나버린 그 빈자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도령도, 현대인들도 떠난 ‘남원’이라는 이름에는 누군가의 숨결과 체온이 남아 있었다. 아주 느리고 미약할지언정…


“그러면 이별이 된단 말이오?”

“이별이야 되겄느냐마는 사세가 훗기약(後期約) 둘 밖에는 도리가 없구나.” - 춘향가의《이별가》中 -


남원의 동쪽에 위치한 춘향테마파크에는 약 2.44km 길이의 모노레일이 철거되지도 못한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보인다. 많은 아이들의 웃음을 가득 실어 나르고자 했던 해당 사업은, 안타깝게도 개통 직후 적자와 운영중단이라는 결과를 맞았다. 그에 따라 모노레일은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오래도록 멈춰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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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매면 서도길 32에 자리한 구 서도역(書道驛)은 현재 기차 운영이 중단되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비롯한 여러 녹빛 식물이 자리잡고 있다. 서도역의 낡은 간판을 보면, 방향의 서쪽(西)이 아닌 ‘글 서(書)’자와 ‘길 도(道)’자가 적혀있다. 한때 누군가의 시작과 이별,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맺어진 덧없는 기약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그곳은 분명, 이야기가 지나간 자리인 것이다.

이처럼, 남원은 떠난 것들 위에 남은 것들을 품고 있다. 그것들 위에 뿌연 먼지가 앉지 않도록, 방문해준 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이 되었다.



“부러진 형장 가지는 공중으로 피르르르르르르르 댓돌 우에 떨어지고, 동틀 우에 춘향이는 토심스러워 아프단 말은 아니 허고 고개만 빙빙 두루며, ‘일’자로 아뢰리다. ” - 춘향가의《십장가》中 -


춘향의 혼은 회상을 이어나가던 와중, 두 눈썹을 찡그리고 입술을 질끈 깨문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한 춘향은 곤장을 맞아야 했으며, 곤장을 맞는 숫자를 세어야만 했던 그날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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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버린 기차역에 몸을 싣지 않은 사람들은 이별의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춘향골공설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봄이면 파릇파릇한 채소가 먼저 소식을 전하고, 여름이면 그늘에서 땀을 식히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허나, 그마저도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시장을 둘러보던 와중, 남원에 몸을 담은지 80여년이 된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녀들을 따라가지 않고 남원에 남아있는 이유가 무어냐고 여쭈어보니,

남원의 뒤에는 지리산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어 공기도 좋고, 물난리도 안 나고, 태풍도 남원을 피해간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인심이 좋고, 서로 도우며 살고, 특히 추어탕이 맛있어서 못 간다고 말씀하시며 미소 지으셨다.


그러다, 애기 우는 소리가 안 난지 오래되어 아기 하나만 있으면 우리도 예뻐 죽겠어, 라는 아쉬운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를 기점으로 이야기는 시간을 역행하게 했다. 어느 순간 그곳에는 어르신들이 아니라, 한창 불타는 사랑을 하고 고사리같은 손으로 집안일을 했던 소녀들이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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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은 오작교를 건너면 좋아하는 남자와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고 했다. 그래서 늘 자신에게 연애를 하면 집에서 쫓아내버릴 거라고 으름장을 놓던 아버지에,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신발을 손에 쥐고 맨발로 살금히 걸어가, 자기 키만한 담을 넘어서 옛 사랑의 손을 잡고 달렸다. 그와 손을 잡고 사진관을 가서 사진을 찍고, 광한루원을 가고, 오작교를 넘었다. 몇 번이고 다시, 다시 한 번.

그 당시에는 네 세대가 한 집에 모여 살아 상을 차리면서도 밥그릇 갯수 까먹기도 하고, 먹을 것이 부족해서 고구마를 삶아 한 입씩 나눠먹었다고 했다. 빨래 양이 하도 많아서 지게를 지고 도랑에 내려가 조물조물 빨래를 하면 하루가 다 갔다고 한다. 특히 겨울에는 그 손이 너무 시려 왔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두 손을 살포시 마주 잡았다.


소녀들의 사랑 이야기는 세월을 돌아 오늘날 어르신들의 남원에 대한 애정으로 남았다.

그 시절의 설렘과 떨림이 옛 기억에 대한 정으로 녹아, 지금의 삶을 남원에 머무르게 했다.

그렇게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춘향이의 혼이, 또 언젠가 찾아올 사랑을 기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 기다림은 멈춘 자의 시간이 아니라, 다시 이어질 무언가를 믿는 사람의 생 자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도련님은 나를 가벼워 업었지만 나는 무거워서 어찌 업어요?”

“아, 내가 널다려 무겁게 업어 달라는 말이냐? 내 양 팔을 네 어깨에다 얹고 징검징검 걸어 다니면 그 가운데 진진한 일이 많지야.” - 춘향가의《사랑가》中-


이도령과 알콩달콩 다투던 춘향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오래된, 그렇지만 낡지 않은, 여러 갈래의 소리 자락들이 남원 전역에 울려 퍼진다. 더 이상 그것은 춘향의 것만이 아니다.

몽룡의 등에 업힌 춘향처럼, 오늘날 남원 사람들도 서로의 어깨에 기대며 천천히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다.

그리고 그 다리의 끝에서 새로운 사랑을 일구는 이들도 있다.


남원에서 머물며 만난 한 카페 사장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스무살 때부터 고향을 떠나 서울에 갔지만 늘 외로움이 함께였기에, 언젠가 자신은 사람들에게 쉼이 되는 공간을 제공해주고 싶다 말했다. 마냥 돈벌이보다, 보고싶고 기다려지는 사람들이 있는 남원이 좋아서 이곳에 카페를 열었다고 했다. 남원은 그가 외로움에서 벗어나 다시 사랑을 배울 수 있는 자리가 되어 주었다.


남원의 의미를 묻자, 남원은 ‘꿈틀꿈틀’ 살아있는 도시같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멋진 야망과 가능성들이 풍부한 곳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날이 저무는 시간에 예촌길을 어슬렁거리며, 청사초롱 불빛이 흔들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자신과 남원에 대한 희망을 느껴왔다고 했다.

기타를 메고 어르신들과 노래할 때, 뜨끈해지던 속과 함께 지금도 남원은 여전히 사랑이 머무는 도시로 그의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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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역에 머물던 기억은 이별과 동시에 희망을 두었다.

장터에서의 하루는 기다림과 동시에 정을 품었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만남은 그 수를 따지지 않고, 모든 기억을 하나로 묶는다.

세월의 길이를 재지 않고, 오래된 소리와 새로 피어나는 마음이 한 데 얽힌다.


그곳에서는 분명, 옛 이야기를 닮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랑 이야기가 쓰여지고 있다.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 사랑이로구나…”


굴: <local.kit> 이혜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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