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짓는 시 – 순천시 개방정원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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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 정영선 조경가


며칠 전 기사로 접한 정영선 조경가의 인터뷰 일부다. 정영선은 우리 모두 한번쯤은 가보았을 도심 속 자연의 어머니다. 그의 이름은 다소 낯설지 몰라도, 그의 공간은 우리에게 사뭇 친근히 다가온다. 선유도공원, 여의도샛강생태공원, 아모레퍼시픽 용산 사옥, 크리스찬 디올 성수…. 빼곡한 도심과 어우러지는 빽빽한 푸른 공간들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정영선 조경가는 정원을 가꾸고 조경하는 일을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 포괄한다. 그에게 정원은 ‘땅에 쓰는 시’다. 조경은 ‘꽃과 나무를 심는 차원이 아니라, 남길 것은 잘 남기고 그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며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닐 게다. 빠르게 지나가는 도심 속 자신의 시간으로 흘러가는 정원에는 분명 철학이 있고, 한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자연의 공간에는 그만의 가치가 있으며, 그 녹음에 담긴 아름다움은 한 편의 시와 같기 때문이다. 이들의 언어는 간결하지만 울림을 준다.


이처럼 땅에 시를 쓰는 한 도시가 있다. 전남 순천시가 그 주인공이다. 순천에는 도시와 사람을 위한 시가 새겨진다. 순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크고 작은 정원들. 필자는 순천만의 시를 읽기 위해 떠났다. 이 글은 각자의 정원을 지켜가는 순천의 이야기다.



순천시 개방정원 방문기


연고도 없는 순천에서 남의 집에 간다.

약속한 시간에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른다.

그곳에는 애정이 담긴 정원과, 그 정원이 담는 사람이 있다.

(처음 만난 나를 반갑게 맞아준 다복이도 있다.)

개방정원은 순천시 내 우수한 민간정원 중 일반에 공개되는 정원을 말한다. 순천시가 2017년부터 운영 중인 정원사업의 일환이다. 크고 작은 정원들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취지로 시작했다. 순천에는 50여개의 다양한 개방정원이 있다. 이 중에는 할아버지부터 삼대 째 꼬박 백 년의 세월을 함께한 정원이 있는가 하면, 고향을 떠나 순천에 살며 가꾼 아늑한 정원도 있다. 이곳 사람들은 저마다의 ‘나만의’ 정원과 함께 살아간다.

순천 매곡동으로 향했다. 전국에서 매화, 특히 홍매화가 가장 빨리 피는 마을이라고 한다. 다만필자가 방문한 3월말에는 홍매화가 이미 다녀갔는지, 아직 오지 않았는지 매화꽃은 만나지 못했다. 대신 홍매화의 아름다움을 짐작케 하는 마을의 벽화들로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봄 내음 물씬 나는 벚꽃나무 길을 걸었다. 그렇게 필자는 이곳 매곡동에서 두 곳의 개방정원을 방문했다.


“저희 집은 큰 나무 하나 보고 오시면 돼요. 저 호박나무.”

바다 위 등대 마냥 홀로 우뚝 솟아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오던 나무가, 알고 보니 대문 안 매산등 집의 이정표였다. 집 아래 언덕부터 보이던 호박나무는 이 곳이 품은 오랜 시간을 말해준다. 처음 방문한 곳은 무려 백 년의 세월을 지낸, 울창한 숲의 정원이었다.


문 앞에 서자마자 격하게 환영해주는 다복이 덕분에 무사히 정원에 들어섰다. 개방정원은 시에서 공개하는 정원이지만 어디까지나 실제 정원주가 거주하고 있는 주거공간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내 방문이 곤란을 남길까 걱정이 들기도 했는데, 다복이의 환영과 정원주 분의 호탕한 웃음 덕분에 걱정을 덜고 편한 분위기에서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정원주의 소개를 들으며 정원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정원이 집을 둘러싸고 있어 마치 요새처럼 느껴졌다. 호박나무, 황금편백, 참빛나무, 산딸나무, 은목서 나무, 나한송, … 나무의 이름을 읊는 정원주의 목소리에는 당연한 애정이 가득하다. 이 정원은 아주 넓고, 또 높고 오랜 나무가 많아서 꼭 숲에 들어온 기분이 드는 그런 곳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는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탁자가 있고, 정원주가 ‘비밀의 정원’이라 칭하는 뒤뜰에는 노란 수선화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 나무 할 것 없이 모두 이 담 안에 살아가고 있는데, 이건 오직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일 것이다. 문을 열면 녹음이 우거진 백 년 된 호박나무와 어디선가 날아온 홀씨의 들꽃이 한 폭에 펼쳐지니 말이다.

정원 한 편의 탁자에서 차를 마셨다. 이 탁자는 정원의 죽은 나무로 만든 것이라 하셨다. 여러 층위의 시간이 중첩된, 이 정원만의 묘한 매력이다.

이곳은 정원주의 할아버지부터 삼대 째 꼬박 백 년간 자리를 지켜온 우뚝한 정원이었다. 정원주 분은 순천 토박이로 줄곧 이곳에서 자랐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정원을 가꾸셨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정원이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정원주는 순천에서 환경디자인 설계를 하는 분이셨다. 정원문화를 가까이 하고 자란 탓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오랜 세월 가꾼 정원인 만큼 백년정원에는 가족의 역사와 개인의 취향, 사람의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그 손길에 더해진 자연의 우연들이 정원을 만든다. 이곳에는 정원주의 아버지가 사랑하셨던 나한송이 유달리 많고, 독일에서 돌아올 딸을 위해 남겨둔 ‘비밀의 정원’이 있다. 나무 위주의 정원에서 몇 안되는, 봄을 알리는 공간이다. 그리고 정원주 부부는 한 켠에 텃밭을 만들어 직접 채소를 기르고 있다. 정원 곳곳에는 다복이만의 ‘히든 플레이스’도 있다.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은 이제 매 봄마다 어김없이 철쭉을 피운다. 백 년의 시(詩)에는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과 선물 같은 우연이 채워진다.

두 번째 개방정원. 아직 꽃이 채 다 피지 않은 초봄에 유독 화사한 정원이었다. 소담스러운 꽃송이들이 감수헌에 봄을 풍긴다.

감수헌은 ‘고요한 물에서 비로소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다’는 뜻을 품은 곳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좁고 긴 복도를 만나게 되는데, 이 통로에 정갈하게 뻗어진 화단은 고요하지만 다채로운 빛깔로 손님을 맞이한다. 실제 긴 복도의 끝에는 작은 못도 자리한다. 이곳 감수헌은 화려하지만 아늑하다.

백년정원이 나무 위주의 숲과 같은 정원이라면, 감수헌은 사계절 새로운 꽃이 피는 아담한 정원이다. 대문길 복도부터 시작해 현관 앞 마당정원, 뒤뜰의 계단정원까지 작은 초화가 가득하다. 정원주는 정원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다양한 식물을 들이는데 신경을 썼고, 사시사철 꽃이 피어 ‘보는 즐거움’이 있는 정원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정원주는 이 정원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전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순천에서 취미로 시작했던 정원이 이제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당을 넘어 집 안까지 식물이 들어선 모습을 보며 정원에 대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감수헌은 온전히 정원주의 취향과 정성이 담긴 공간이다. 가족의 만류에 식물을 그만 들여야지 하다가도, 예쁜 ‘아이’를 보면 ‘데려올 수’ 밖에 없다고. 정원을 말하는 그의 언어 곳곳에 사랑이 묻어 있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정원주와 나눈 개방정원의 정책적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해가 지날수록 정원을 가꾸는 일이 힘에 부치는데, 작은 지원이라도 보태 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매해 여러 순천시 정원여행에서 감수헌은 ‘인기 개방정원’이다. 정원주는 이때 자신의 주거공간을 단체여행객들에 공개해야 한다. 그 외로 필자와 같이 센터를 통해 방문하는 손님도 많다. 고요한 감수헌에 손님들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정원주는 ‘이렇게 노력하는데 정원 가꾸는 일을 조금 도와줄 순 없을지’ 조심스레 한탄했다. 개인의 사적인 공간을 오직 사랑만으로 나누어야 하다니, 참 지독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감수헌에 있는 모든 수목과 초화에는 이름표가 있다. 누구나 식물의 이름을 알 수 있도록 정원주가 손수 적어서 단 것이다. 꾹꾹 눌러쓴 글자에서 넘치는 사랑과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감수헌은 그의 마음을 비추는 고요의 정원이다. 고요의 시(詩)는 조용히 자신만의 향기로 말을 건넨다.


순천에서 평생을 지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쩌다 보니 순천에서 살게 된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정원에 나무를 심고 숲을 누리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작은 꽃들이 보여주는 계절의 변화를 만끽한다. 순천에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을 닮은 ‘나만의’ 정원을 가꾸고 살아간다. 정원은 각자의 모습으로 한 편의 시가 되며, 이 시에는 삶의 향기가 묻어난다.


집에 시를 짓는 사람들. 아무튼, 이곳은 순천이다.


글·사진: <local.kit in 전남> 사회팀 이시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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