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수정체성을 위한 기록, 여수역사달력

by 로컬키트 localkit

69년 전 오늘은,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위치한 여수종고중학교의 개교일이다. 45년 전 오늘은, 대통령 정화 지시로 오동도 상가 철거반대 유혈 소동이 벌어진 날이다. 12년 전 오늘은, ‘버스커버스커’의 <여수밤바다>가 발표된 날이다.


그리고 2024년 3월 29일 오늘, 로컬키트는 여수에 있는 시민감동연구소의 문을 두드렸다. 시민감동연구소는 여수의 역사를 담은 ‘여수역사달력’을 7년째 발행하고 있는 한창진 대표가 있는 곳이다. 누군가는 쉽게 지나칠 법한 달력 속의 수많은 날들을 기록하는 그가 지켜나가고자 하는 여수의 기억들에 귀 기울여보자.




1. 잠에서 깨어난 여수의 역사


안녕하세요, 대표님! 자기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여수에서 태어나 여수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여수에서 교사직, 시민운동, 사회 운동을 열심히 한 한창진입니다. 퇴직 이후에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우리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지식과 영감을 전달하고자 시민감동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수역사달력’을 소개해 주세요!

대부분의 달력은 올해의 특별한 날짜를 기록해 두는 것에 그쳐요. 하지만 여수역사달력은 여수의 역사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달력을 보면 ‘몇 년 전 오늘, 여수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었구나’를 알 수 있는 거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버린 해난 사고들, 지방 소멸로 인해 없어져 버린 학교의 폐교 날짜들. 그런 것들을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또, 여수 산단에서 발생하는 환경 사고와 안전사고가 난 날을 적어 두어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개선해야 할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어요. 2018년도부터 1년에 약 2,000권 정도를 판매하고, 여기에서 난 수익금으로 연구소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습니다.


형식으로 ‘달력’을 선택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책은 책꽂이에 들어가면 잊히기 쉽지만, 달력은 매일 볼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 하면 여수의 역사에 대해서 오래 기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우리가 매일 보는 달력에 여수의 역사를 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수에서 일어났던 여수의 주요한 일들을 날짜에 맞게 기록해두었어요. 목표는 역사학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수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는 거니까요.


달력은 미래를 보는 데에만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어요. 달력을 통해 여수의 과거를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맞아요. 이런 달력은 전국에서 처음이지요. 저는 여수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시민운동과 시민단체, 인터넷 신문까지 만들며 여수에 대해 정말 많이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달력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달력을 펴냈을 때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상상도 못했던 일을 해냈다는 것이 저의 아주 큰 자랑입니다.


여수역사달력을 만들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있었다면요?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여수의 역사가 충분히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역사 달력을 만들 때에는 검증된 역사책과 자료를 참고해야 하는데요. 중심지였던 곳들은 중요성을 인정받아왔기 때문에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지만, 여수는 전라좌수영이라는 군사기지였기 때문에 기록이 충분하지가 않아요.

사실 제가 역사학자는 아니잖아요. 제 일은 단지 역사를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변형시켜서 독자들한테 보여드리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기록이 풍성해야 되는데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이 제일 큰 고충이에요.


이 점은 제가 늘 ‘일기 쓰기’를 강조하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는데요. 제가 일기 쓰기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이유는 그날 그날의 기록을 담은 작은 일기부터 시작하여 역사를 구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역사는 작은 기록에서부터 시작되니까요.




2. 작은 것들에서부터 시작되는 역사


문화를 뜻하는 ‘culture’가 '재배하다'라는 의미의 'cultivate'에서 비롯되었듯이, 문화는 우리가 사는 삶 속에서 피어난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함께 살아온 경험과 습관은 곧 지역의 문화가 되고, 지역의 문화들이 모이면 국가적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다. 공동체의 역사가 나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면 그 시간들이 멀게만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그 이야기는 나와 무관할 수 없다. 우리가 어느 땅에 살고 있든 이 땅의 이야기는 우리 삶과 끊임없이 얽혀 있다.



여수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으신가요?

여수에 남다른 애정을 갖는 것은 여수에서 태어나서 많은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태어나서 기어다니고 이렇게 클 때까지 발 디뎠던 이 땅이 소중하다는 마음은,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정도의 차이일 있을 뿐이지 다 같은 종류의 마음일 것이라 생각해요. (웃음)


여수 정체성을 여수 시민들이 함양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가 여수 역사 달력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여수 정체성이 여수 사람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 역사를 이어가게 하는 것이죠.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은 모두 하나의 공동체로서 중요하고 그 역사는 지속적으로 만들어져 온 것이에요. 여수의 경우, 그 역사는 주로 여수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지역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이 소중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해요. 개인이 행동하는 모든 순간이 지역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수시민들이 여수 정체성을 함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요?

(1) 개인이 자신만의 역사관을 가져야 해요. 기록하는 삶을 통해 가능해지는 지점이죠. 개인의 행동이 모여서 지역의 문화가 되고 지역의 문화가 쌓여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임을 인식해야 해요. 내가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 지역의 역사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마침내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요.

(2) 어릴 적부터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배워야 해요. 앞서 여수 정체성은 우리 조상들의 역사와 문화를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했었죠. 그 흔적들은 여수 곳곳에 남아있어요. 어릴 때부터 여수의 문화유적지를 많이 다니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죠.


그렇다면, 여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여수역사달력 외에도 진행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가요?

여수에 헌책 도서관을 세워보고 싶어요. 지금 여러 도서관에서는 5년이 지나면 신간을 폐기 처분해버려요. 오래 보존할 가치가 없는 건 다 버린단 말이에요. 언제부터인가 너무 소비 중심의 사회로 변하면서 과거의 문화가 소홀히 여겨지더라고요.


주택에서 아파트로 문화가 바뀌면서, 여수에서도 나이 드신 분들이 이사를 가면서 헌 책들을 많이 버려요. 어르신들은 애지중지하면서 꼭 남겨야 된다고 하는 책들도 서울에 사는 자식들이 싹 다 버려버리는 거죠.


정말 소중한 자료들이 그냥 폐지로 팔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책들을 받아주는 도서관이 있으면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 미래에 살고 있는 세대들이 옛날 책들을 손쉽게 볼 수 있을 거예요.


벌써 마지막 질문이네요. 지금 여수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여수는 산업체가 큰데도 그 인구는 매년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에요. 그러나 이것을 거스르기보다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행복한 도시를 만드는 데 자본력이나 물질적인 부분만으로는 절대 만족할 수가 없거든요.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들이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이들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도시 발전의 방향을 바꾸어야 해요. 지나친 자본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인문학적인 가치를 존중하고 널리 퍼지게 하는 것이 핵심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역사, 철학, 문화 등이 함께 어우러진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존재 가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회라면 누구나 떠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잖아요.




역사는 개인적인 기억을 넘어서 집단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문화적인 기억이다. 지역의 정체성은 우리 조상들의 역사와 문화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그 정체성의 보존과 붕괴는 집단 구성원들이 함께 기억하고 망각하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즉, 우리가 사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잊지 않는다면, 그 지역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시민감동연구소는 지역이 품고 있는 기억을 매일 여수역사달력에 기록하고 있다. 여수역사달력은 ‘여수 정체성’을 위한 기념비적인 시도이자 간절한 노력이다.


글·사진: <local.kit in 전남> 예술팀 김현진 에디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삶에 깃든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