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ocal Park May 10. 2020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서울, 낯선 도시에서의 시작

매사 부정적인 사람에게 도전이라는 건 비웃기 딱 십상이다. 그거? 어차피 안 될 거야. 그래서 안 하는 거지 못 하는 게 아니라.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넘기지만 실상은 실패할까 두려워 시작조차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부정적인 사람은 겁이 많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 않을 이유를 늘어놓는 건, 실패했을 때 체면을 세울 수 있는 보험 하나를 드는 셈이다. 그런 겁쟁이에 가까운 사람인 내게  '도전'은 인생에서 그리 자주 입에 올린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기어코 찾아보자면 소소한 도전과 성취가 아예 없진 않겠다.


경상도의 한 광역시에서 나고 자랐던 나는, 한참 자라서도 물가에 내놓기가 못 미더운 막내였기에 결혼 전까지 독립은 없다고 부모님은 못을 박아 둔 상태였다. 2010년, 그런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해 독립하며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한 회사에 입사 날짜를 받아놓고 부리나케 결정된 사항이었다. 낯선 도시의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장밋빛일 거라 감히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제 막 세상의 출발선에 선 나로선 앞만 보고 달려가면 많은 성취들이 저절로 따라올 거란 순진한 기대는 있었던 것 같다. 대도시의 생리에 내가 적응하지 못하리라 호언장담하는 부모님 앞에 나는 증명하고 싶었다. 막내도 꿋꿋하게 혼자서 잘 살아낼 수 있다고. 급한 물품만 캐리어에 담아 상경한 후 급하게 계약한 숨구멍처럼 조그맣게 뚫린 창문이 있던 고시원 방은 불행의 전조처럼 마음속에 약간의 그늘을 지웠지만, 나는 힘껏 외면했다.


그해 겨울, 부모님과 모종의 거래라도 한 듯 서울은 이상기온으로 연일 폭설이 내렸고 서울은 꽁꽁 얼어붙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은 그보다도 더한 극지의 추위였다. 불만에 차서 늘 꼬투리 잡는 직장 상사, 순화가 전혀 안 된 사투리가 신기한 듯 매번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직장 동료들. 적막이 두려워 상시 켜 놓는 티브이가 퇴근 후 일상이었고, 만날 사람도, 돈도 없어 이틀 꼬박 고시원에만 박혀 있는 게 나의 주말이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 큰 도시에서 나만이 홀로 부유하는 이물질 같았다.

 

연일 몸과 마음을 강타한 추위는 내게 정말로 버텨낼 재간이 있겠냐 윽박지르고 있었다. 외로움과 우울함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자 나 스스로도 이곳에 발 붙이고 살 수 있을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그래, 송충이는 솔잎이 있는 곳에 있어야겠지. 그런 내 마음속 균열을 후벼 파듯 부모님은 틈만 나면 귀향하라 권유했고 나는 자주 흔들렸지만 현재의 괴로움보다 부모님의 득의양양한 ‘내 그럴 줄 알았다’가 더 두려웠기 때문에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버틸 뿐이었다. 그 시절 내가 비빌 언덕은 그 말이 유일했다. 못 미더운 막내임을 증명하는 건 죽기만큼 싫었다.


 그로부터 강산이 한 번 변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첫 서울 살이를 시작했던 그 근처는 지나가지도 않는다. 분명 여러 계절을 보냈지만 내게 그곳은 서슬 퍼런 한 계절만을 상기시킨다. 그런 일련의 시간 후 나는 결국 귀향했다. 채 1년이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외로움과 우울함을 꾹꾹 눌러 담다 도달한 한계치였다. 당시 너무 지쳐 부모님의 반응은 생각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기에 여태껏 버텨낸 시간이 무색하게 쉽게 귀향을 결정 내릴 수 있었다.

여러 생채기를 가득 안고 돌아온 고향에서 나는 곧 익숙하고 안온해졌다. 하지만 생채기와 흉터가 가슴속엔 잔불로 남았던 걸까. 몇 개월 후 나는 또 한 번 서울로의 상경을 결심하고 그 후로는 어쨋튼 나는 이 곳에 남아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여러 청춘들에게 분노를 유발했지만, 나는 종종 이 문장을 생각한다. 그 시절 나는 어리고 건강하고 또 나의 재능도 믿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힘들고 아팠던지. 이 도전을 이뤄내고자 너무나 결연한 의지 때문에 되려 흔들리는 법을 몰랐다. 작은 상처에 방관도 필요한 법인데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다 기어코 흉이 지게 했다. 결국 그런 미숙함마저 처음의 모습이기에 그 시절을 이제는 감사하고 사랑할 수 있다.


 십 년을 살아도 순화되지 않은 경상도 사투리 덕분에 나는 말 한마디로도 쉽게 출신을 간파당한다. ’ 이곳 사람이 되는 것’ 나는 아직 이 도전이 끝났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언제 다시 이 도시가 냉혹해 질지 알 수 없기에, 이방인으로서 오늘도 하루 살아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도 칼을 갈던 이 도시를 이젠 조금은 사랑하게 됐으니, 기특하다 잘 버텼다.




 

작가의 이전글 프리랜서 사이언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