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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May 23. 2018

로디즈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1

가~다의 영화들, 김영찬/정재욱/표국청

<길 잃은 드라마>, 라울 루이즈, 2017 



   날 <항해사의 세 개의 왕관>을 보고 한 차례 혼란을 겪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는 조금 더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길 잃은 드라마>는 라울 루이즈의 3기(<항해사의 세 개의 왕관>에 대한 글 참조) 영화에 해당한다. 루이즈가 오랜 망명생활을 끝내고 칠레로 돌아와서 촬영한 오롯이 ‘칠레’에 대한 영화이다. 칠레라는 나라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아쉽지만, 이 영화는 완벽한 ‘내셔널 시네마’의 영역에 위치해 있다.


   영화가 촬영되었던 90년대의 칠레의 모습을 라울 루이즈라는 감독은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 대한 답을 <길 잃은 드라마>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는 총 7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으며 옴니버스인 것 같지만 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다음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보는 티비 속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등 연결이 되어 있다. 각 에피소드의 내용은 역시나 복잡하지만, 7개의 에피소드 모두를 모아 보면 주제 의식은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  

    

   루이즈 감독이 돌아와 마주한 칠레의 현실은 ‘텔레노벨라스(Telenovellas)’ 즉, 우리나라로 치면 막장 드라마보다 더 심각하다는 시선과 칠레의 미디어는 이러한 사실을 다루기보다는 감추려 한다는 비판이 영화 속에서 공존한다. 특히 7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전 생에 나쁜 일을 많이 하면 다음 생에 칠레에서 태어난다’라는 칠레 사람들의 자조적 농담을 제목으로 채택하면서 주제를 명확하게 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루이즈 감독이 가진 스타일로서 관객을 미로에 빠뜨리는 연출은 이 영화에서도 유효하다고 생각이 드는 이유는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인물과 인물들의 대사는 연결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매 번 존재하면서 관객에게 좌절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이후 있었던 시네마 클래스에서는 라울 루이즈 감독의 생애와 영화적 경향성 그리고 몇 개의 작품에 대한 잠깐의 상영을 통해 그의 스타일과 내러티브의 구성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1기, 2기, 3기로 나뉘는 루이즈 감독의 영화적 경향성에 대한 이해와 이를 통한 전체적인 주제의식의 파악이 가장 중요하며 감독은 이야기 자체를 하나의 미로처럼 만들어 관객을 그 미로 속에 위치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우리가 보통 영화를 볼 때처럼 스토리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때, 관객석에서는 희미한 웃음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 김영찬     


<굿 비즈니스>, 이학준, 2018     



    문제적 다큐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야말로 ‘문제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다큐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에서 필자는 이 말을 쓴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극영화를 본듯한 <굿 비즈니스>에 대한 의문은, 크레딧이 올라가는 그 즉시 시작된다. 이 글을 통해서 그 문제적인 지점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다. 그리고 관객들의 생각이 그 무엇보다도 궁금하다. 이것은 필히 감독도 그러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실제로 탈북고아들을 밀입국하는 시퀀스는 극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보자마자 정말 동네 뒷산에서 재촬영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것은 그 이미지들 때문이 아니라, 목숨과 인생을 거는 사람들에게,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카메라와 조명을 피사체에 담아낸 그 행위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든다. 감독과 스태프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위험한 짓을 했을까. 


   하지만 모두 했다. 이 영화의 카메라들은 다큐의 카메라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이런 위험한 순간들을 여러 대의 카메라로, 여러 앵글로 찍어낸다. 다큐를 찍음에 있어 다큐 대상의 어디까지를 담을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를 제쳐두서라도 이 영화 반 이상은 스태프들도 모두 목숨과 커리어를 내걸고 찍은 작품이다. 이렇게 격하게 글을 쓰고 표현하는 이유는, 혹여나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영화의 장르성에 가려져 잊고 있을까 봐서이다. 이 영화는 ‘실제 상황’이다. 당신은 당신의 목숨, 당신의 크루의 목숨, 그리고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의 목숨까지 걸며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이 영화는 무엇이기에 이러한 리스크가 허용이 되는 것인가? 혹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리스크들이 이 영화의 장르성과 더불어 호응하는 이유는 <굿 비즈니스>의 카메라가 가지는 욕망 혹은 딜레마가 이 카메라가 주로 담는 김성은 목사의 것과 어떤 한 지점에서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필자가 이야기하는 이 카메라의 욕망이 무엇인지부터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다큐라고 하기에는 보기 드물게 장르적으로 찍혔다. 정말 위험한 순간에서 조차도 이 영화의 카메라는 더 극적인 구도를 고민하고, 편집에서 조차 그런 고민들이 깃들어있다. 


   이 영화의 비롤(B-roll)까지는 볼 수 없기에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리스크 테이킹을 하며 이 영화를 찍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실 보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다. 일반적인 다큐에서라면 이것은 큰 윤리적인 비판 점에 봉착한다. 감독은 이 자극적인 소재를 이용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소비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굿 비즈니스>가 가지는 차이점은 이런 딜레마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이 위에 언급한 김성은 목사의 어쩌면 숨겨진 욕망을 일종의 폭로를 하면서 나타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김성은 목사의 딜레마는 본인 스스로 영화 속에서 고백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김성은 목사를 변호하거나 그를 신화화시키지 않는다. 그는 영화 속에서도 밝히듯 분명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이 북한 고아들의 구출 행위는 유명세를 타면서 하나의 구출 사업이 되었다는 것을 스스럼없이 인정한다. 영화는 심지어 이런 사업화의 지점을 비난하는 한 북한 출신의 브로커도 관객과 만나게 해준다. 영화는 그렇게 예리하게 김성은 목사를 의심하고 또 질문한다. 


   우리가 당황하는 지점은 그러한 의심을 김성은 목사 스스로도 하고 있다는 지점에서이다. 그도 사실 더 이상 이 사업을 좋은 의지만을 가지고 한다고 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그 순간에 관해서 우리는 다시 이 영화의 카메라와 편집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6년간 제작되었다는 이 영화는 분명 이러한 사회적 이슈를 알리는데 시작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의도만을 가지고 영화는 팔릴까? 어찌 되었던 산업의 영역에 종속되어 있는 영화라고 하는 예술은 어떻게 살아남아야만 할까?

     

   그래서 <굿 비즈니스>가 보여주기로 선택한 김성은 목사의 시기가 또 흥미롭다. 우리는 김성은 목사의 전 생애를 보기보다는 한 순간을 엿본다. 그것은 그가 결국 입양하게 된 세 북한 딸들의 이야기의 시작과 끝(최소한 입양되는 것을 결과로 보았을 때의 끝)을 보게 된다. 영화의 첫 장면은 두 딸이 김성은 목사에게 탈북을 도와달라는 요청하는 영상이다. 김성은 목사에게 있어서는 탈북을 도와주는데 조건 있다. 그것은 ‘고아’라는 조건이다. 하지만 이 두 딸은 고아가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김성은 목사의 규칙을 깨는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고아가 아님에도 도와주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시점에서 이러한 김성은 목사의 선택은 무언가를 증명해 보이기 위한 행동처럼도 보여진다. 왜냐면 그는 탈북하도록 도와주는데 그치지 않고, 그 딸들을 입양함으로써 일종의 책임을 다하려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입양이라고 하는 선택은 그가 계획한 미국으로의 입양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기에 내린 선택이지만, 이 또한 하나의 선택이라는 점이다.

      

   사실 그는 그들을 직접 입양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본인의 건강도 어려운 마당에 말이다. 영화 내내 그는 자기가 여전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한 일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은 듯하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 그러한 욕망이 자본주의를 만났을 때, 그 선함은 하나의 사업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은 선한 사업이 되어버린다. 무엇이 먼저인지 헷갈린 채로 말이다. 선한 일이 우선인지, 사업이 우선인지.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며 누구나 빠지는 딜레마. 어떤 가치가 돈으로서 환원이 가능한가? 그것을 환원했을 때 그 가치는, 본래의 본질적 가치가 아닌 자본으로서의 가치로만 인정되는 것은 아닌가? 그래도 괜찮은가? 이러한 위험한 질문들 속에서 줄타기하는 영화가 바로 <굿 비즈니스>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 정재욱

   

<누가 총을 쐈는지 궁금해?>, 트래비스 윌커슨, 2017 

    


   필자는 아직 조던 필레 감독의 <겟 아웃(2017)>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미국 영화에 가지고 오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겟 아웃> 이전의 인종차별(특히 흑인 차별)에 관한 영화들은 차별에 대한 aftermath 혹은 차별에 맞서는 일종의 영웅 서사를 다루었다면 2017, 2018년 현재는 ‘차별’의 뿌리 혹은 그 정의에 대해서 재정립하려는 노력까지 있는 듯하다. 이러한 변화가 중요한 것은 아마 이 영화의 오프닝에서도 지적하듯이 그 이전의 영화들은 모두 ‘백인 중심 서사’로 이루어졌다는 지점이다.


  <블랙팬서>가 모두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화제가 된 것에는 충분한 배경이 있다. 놀랍게도 그런 서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 전주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누가 총을 쐈는지 궁금해?>는 감독 본인이 미국 백인 감독으로서 자신의 뿌리를 쫓으며 백인 중심 서사에 가리어진 미국의 역사의 이면의 미국계 아프리카인의 서사를 발굴하고 또 이면에 우리가 지워온 백인 서사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누가 총을 쐈는지 궁금해?>는 영화 <앵무새 죽이기>의 한 장면으로 시작을 한다. <앵무새 죽이기>의 서사는 지금 미국의 근간을 이루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유명한 서사 중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윌커슨 감독은 본인의 내러티브로 <앵무새 죽이기>를 비판하며 영화가 시작한다. 이것은 판타지라는 것이다. 감독 본인 또한 앨러바마 출신으로서, <앵무새 죽이기>의 배경인 1930년대에 핀치라고 하는 인물은 거짓말이고, 상상 속의 존재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1940년대 핀치가 살던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백인이 흑인을 총으로 살인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 백인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감독 본인과 할아버지의 관계를 시작으로 감독과 가족 간의 관계와 그의 고향과 그의 가족의 관계, 심지어는 로자 파크와 관계까지 이야기하며 진행되는 이 영화는 그 추적의 과정이 만들어내는 서사만으로도 아주 흥미진진하며 충격적이다. 이 글 또한 그것에 대해서만 잘 정리해도 재밌어질 만큼 말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 감독이, 이 영화가 백인 영화감독으로서, 흑인 서사를 다루려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차별에 대해 다루려고 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대게 ‘현재’ 혹은 ‘지금’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전’ 혹은 ‘과거’에 있었던 차별에 대해서는 잊고 ‘미래’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루어진 차별 혹은 폭력에 대한 비용은 일종의 매몰비용이라고 생각을 하고 서사를 진행한다. 윌커슨 감독은 과거에 그와 그가 가족이 냈어야 할 그 ‘비용’을 잊지 않기 위해 이 영화를 찍은 듯하다.

      

   그런 비용을 잊지 않기 위해 감독이 택한 형식은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이다. 영화는 4개의 부로 나뉘어 있고, 각 부의 시작은 기억해야 할, 혹은 기억하지 말아야 할 이름들을 나열하며 시작한다. 하지만 사실 이 이름들은 기억(기록)에 남은, 그리고 기록(기억)에 남지 않은 이름들을 우리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의 혹은 가족의 치부를 노출하는 동시에 잊혀진 한 흑인의 이야기를 할 것을 관객에게 다짐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항상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사로 끝이 난다. 감독의 육성으로 그는 매번 스스로는 이렇게 영화를 찍는 백인 영화감독이고, 스팬은 잊혀진 한 흑인이라는 것을(정확한 내용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것은 마치 자기고백적인 하나의 시의 형식과도 흡사하다.

      

   하지만 이런 형식으로 통해서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 용서를 구하기 위함은 아니다. 윌커슨 감독은 이미 ‘용서’는 허상이고 사치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용서를 구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아주 위선적인 행동밖에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단순 폭로 다큐를 찍는 것도 아니다. 사실 몇십 년 전에 죽은 한 흑인에 관한 폭로에 누가 관심을 가지겠는가(지금도 이런 차별은 이토록 당연한 것이거늘.).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차별이라는 것이다. - 정재욱

     

<더 트리>, 안드레 질 마타, 2018     



   화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지칭하지 않는다. 단지 허름한 집과 마을, 그리고 자연이 스크린에 재현된다. 매우 느린 움직임의 카메라는 인물들을 다그치는 법이 없다. 인물들은 그 한정된 장소에서 한정된 행동을 보여준다. 물을 긷는 할아버지와 숲 속을 방황하는 소년의 시각에서 반복되는 플롯과 그 플롯이 교차하는 순간 두 인물은 처음으로 마주치고 우리는 그제야 두 인물이 어쩌면 동일인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시간대를 통과하는 만남으로 일종의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지칭성이 결여된 영화는 결국 보편성으로 귀결된다. 감독은 영화를 특별한 장소에서 촬영하였음에도 그 특별한 장소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다루고자 했던 인류의 보편적 서사를 통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 표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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