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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May 23. 2018

로디즈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2

라~마의 영화들, 김영찬/정재욱/표국청

<루스, 장 비고에 대하여>, 레일라 페로-레비, 2016     



   화를 공부하면서 장 비고라는 이름을 모르는 것은 조금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필자도 이름은 부끄럽게도 그의 영화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짧은 필모와 명성 덕분에 필모는 모두 외우고 봐야지 봐야지 하며 미루고 있었다. 이렇듯 장 비고는 대부분의 영화인들에게는 일종의 아이돌로서 남아있다. 하물며 프랑스에서는 어떻겠는가.

      

   영화의 시작은 장 루스의 집 거실을 패닝 하며 시작한다. 패닝을 하며 보이는 <라탈랑트>나 <품행제로>의 소품들은 장 비고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한 껏 설렘을 안긴다. 마치 장 비고의 세계로의 초대랄까. 하지만 우린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혹은 영화를 보다 보면 깨닫는 것이 있다. 저 수많은 artifect가 모두 박물관이 아닌, 장 루스의 개인 집에 있다는 사실이다.

     

   장 루스는 장 비고의 딸이자, 프랑스의 평론가이다. 장 비고의 딸이 영화 평론가가 되는 것은 뭔가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루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장 비고라는 것을 십 대 때 알았으며, 그가 영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 중 한 명이라는 것도 14살 때 알았다고 한다. 그녀가 아버지를 알기 위해 영화를 시작했는지, 단순히 정말 영화가 좋아서 영화를 시작한 것인지는 우리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장 루스에게 장 비고라는 인물은 ‘아버지’라는 인물로서가 아닌 프랑스 영화감독의 ‘아이돌’로서 먼저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배경은 아버지의 유품들을 개인적으로 보관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딜레마이었을 것이다. 영화평론가로서 이 중요한 자료들을 공유하는 것이 의무 일터, 그녀가 아버지라고 하는 개념에 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물리적 끈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프랑스 시네마테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유품을 건네줄 수 없었던 것일 것이다. 이러한 지점이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든 지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쩌면 장 비고를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던 감독은 어느새, 장 루스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영화가 반 즈음 지나면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스, 장 비고에 대하여>의 클라이막스는 장 루스가 <라탈랑트>의 한 장면을 보여주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준다고 할 때 있다.  

    

   이 영화를 장 비고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을 하고, 그에 대해서 더 배우거나 알고 싶어 이 영화를 찾는다면 필자는 장 비고에 대한 다른 다큐 혹은 서적을 볼 것을 추천한다. 왜냐면 이 영화의 카메라는 장 비고라는 인물보다는 그의 딸 장 루소에 집중을 하는 영화이며, 그녀가 기억하는 장 비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 정재욱     


   화는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심지어 작품이 4편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젊고 자유로울 작가 장 비고의 딸 루스 비고와 그녀가 살아온 공간을 보여준다. 공간 안에는 필연적 이게도 장 비고의 흔적들이 남아있고 이는 인간 루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흔적, 평론가 루스에게는 위대한 감독이 남긴 족적이다.     


   작품 내내 사적 영역의 아버지와 공적 영역의 감독 장 비고의 사이에서 그를 그리워하는 루스의 모습을 다룬다. 그리고 고맙게도 카메라는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하나의 장 비고를 선택하게끔 강요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녀의 곁에서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멀게 그녀의 고민을 지켜보고 함께 고민한다.     


   영화는 사적 영역의 장 비고를 그리며 공적 영역의 장 비고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이는 매우 영리한 편집으로서 가능해지며 나래이션과 함께 장 비고 영화들이 가진 아름다운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시한다. 

    

   이때 이미지는 단순히 관객에게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장 비고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드러내게끔 도와주며 이는 곧 우리로 하여금 장 비고라는 감독, 사람을 사랑하게끔 만든다. 어쩌면 이는 영화를 이야기하는 주체가 장 비고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있는 그의 딸 루스 비고이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루스 비고는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나 역시 영화를 보며 행복했다. 루스의 안식을 기원한다. - 표국청     


   “십 대가 되어서야 아버지가 유명한 감독이라는 걸 알았어요”라는 루스의 말로 글을 시작하고 싶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자란 루스에게 장 비고라는 감독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이다.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감독이자 잘 모르는 나의 아버지, 루스는 트렁크에 담겨있는 장 비고의 기록들을 통해 오히려 가장 사적인 감정을 내비친다. 영화 내내 루스가 보여주는 장 비고에 대한 기록들은 장 비고를 이해하기 위한 소구들로 작용하지 않는다. <라탈랑트>에 장 비고의 목소리가 들어가 있고, 루스의 어머니가 잠깐 출연한다는 이야기들을 통해 루스는 다시금 내가 알 수 없었던, 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들과 함께 기록들을 살펴보는 그의 모습은 마치 가족의 사진첩을 둘러보는 우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간에 등장하는 루스의 젊은 시절 영상은 그런 이중적인 감정이 어떤 삶의 태도로 드러났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장 비고의 딸이지만, 현재 영화 평론가이자 프로그래머로 일 하고 있다. 나를 장 비고의 딸로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그녀의 말은 자신의 아버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드러나는 요원함과 동시에 위대한 감독인 장 비고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루스가 장 비고라는 사람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자신의 아들이 34세에 죽었을 때라고 했다. 아들이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29세에 사망한 아버지가 얼마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지가 실감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제야 아버지가 남긴 업적이 나이에 비해 대단했다는 사실도 깨달은 것 같다. 그가 기록에 대해 보이는 집착도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영화계의 발전을 위해서 기록을 보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 기록마저 사라진다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존재마저 사라지기 때문이다. 

     

   감독 페로-레비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루스가 다큐멘터리 촬영을 거부하다가 몸 상태가 악화된 이후에 촬영을 허가했다고 밝혔다. 어쩌면 그가 다큐멘터리 촬영을 받아들인 이유도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난 아버지이자 감독인 장 비고에 대한 기록을 통해 또 하나의 기록을 남기고자 하는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 중간 장 비고의 아내에 대한 의사의 소견이 담긴 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의사는 ‘나는 척추의 문제를 치료하는 의사지, 사랑의 병을 치료하지 않는다’며 장 비고와 아내 사이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을 정말 좋아하는데, 29세의 나이 <라탈랑트>를 촬영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던 장 비고와 또한 고통을 겪고 있던 그의 아내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 때문이다. - 김영찬 

   

<뤼미에르!>, 티에리 프레모, 2017    

 


   화에 등장하는 나래이션을 빌려오고 싶다. 도시를 관통하는 강의 위에 떠있는 배. 그리고 아마도 그 배 위에 놓여있었을 카메라가 멈춰있는 도시의 건물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등장하는 나래이션. 

    

   “뤼미에르의 촬영기사 중 한 명은 멈춰 서있는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을 촬영할 수 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짧은 50초 분량의 영화에는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최초의 발상이 구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와 형제의 기사들이 촬영한 1400여 편의 영화들 중 108편의 영화를 보여주며 영화에 대한 설명을 나래이션으로 덧붙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영화에 대한 무수히 많은 최초의 발상들을 발견하는 영화. 아니, 영화들의 집합체. - 표국청  

   

<마르코 페레리: 위대한 미치광이>, 안셀마 델올리오, 2017 

    


   <항해사의 세 개의 왕관>의 혼란이 가시지 않은 채로 두 번째 영화인 <마르코 페레리: 위대한 미치광이>를 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한 이탈리아 감독에 대한 다큐멘터리인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드는 감정은 궁금증이었다.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영화 역사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이탈리아 영화의 위대한 감독들의 이름을 떠올려보자. 로베르토 로셀리니, 페데리코 펠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 루키노 비스콘티 등 많은 감독들이 있지만 마르코 페레리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이 감독의 어떤 점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만큼 매력적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영화는 마르코 페레리의 영화들과, 그의 생전 인터뷰 그리고 페레리와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로베르토 베니니, 카이유 뒤 시네마의 전 편집장 등의 인터뷰로 구성되어있다. 마르코 페레리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와 동시대 사람이지만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지도, 누벨바그 또는 포스트바그의 영향을 받지도 않은 ‘페레리’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페레리가 저평가된 이유는 무엇일까?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렇게 답한다. “이토록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고, 불쾌감을 줄 수도 있는 이미지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감독은 대중의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 특히 페레리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놀라울 정도인데, 그는 자신의 영화를 이론적으로 정의하거나 구조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언론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영화를 영화로만 봐줄 것을 요구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그의 작품 중 <그랑 뷔페> 정도만이 시네마테크에서 상영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르코 페레리라는 감독이 가진 영화에 대한 태도와 그의 영화들은 오늘날, 그리고 한국의 지금 세대들과 맞닿아있는 지점이 많은 것 같다고 안셀마 델올리오 감독은 GV에서 밝혔다. 언젠가는 하얀 뱀의 창구를 통해 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 김영찬 

    

<미스미소우>, 나이토 에이스케, 2017 

     


   드나잇 시네마로 분류되어있던 <미스미소우>를 보고 나왔을 때 영화관 밖에서는 충격과 공포, 그리고 당황의 목소리들이 들렸다. 심지어는 ‘이 영화가 어떻게 전주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거냐’는 격앙된 외침도 있었다. 이런 반응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던 것은 <미스미소우>가 고어물이기 때문이다.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소녀가 가해자들에게 행하는 복수, 이를 고어로 표현한 영화는 시종일관 바라보기 어려운 장면들로 관객들을 힘들게 했다.      


   <미스미소우>가 보여주는 고어는 소노 시온 감독의 2016년 작품인 <도쿄 흡혈 호텔>과 화면 연출 면에서 유사성이 있다. 시종일관 따듯한 색감과 아름다운 미장센 속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학살극과, 영화가 어느 지점까지 달하면 이 잔인함을 어이가 없어 웃어버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영화 초반 잔인한 장면이 나올 때 놀라서 앞좌석을 발로 차거나 소리를 지르던 관객들은 후반부 지점에서는 황당하다는 듯한 감탄사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실제로 에이스케 감독은 영화를 일종의 장르 코믹극처럼 생각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강점은 있다. 먼저 가해자들이 자신의 죄책감을 정당화하는 방식에 대해서 영화가 보이는 태도는 흥미롭다. 처음에 죽는 세 학생은 자신이 폭력을 행사한 이유를 피해자에게 돌려 그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사람과 죄책감과 범죄 사실이 드러나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뒤섞여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사람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사람의 행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 태도 중 어느 것도 온전한 속죄는 될 수 없기에 그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집단 따돌림의 주동자지만 주인공(노자키 하루카)의 집을 불태우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은 타에코는 직접 하루카의 집 앞까지 찾아가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며 궁극적인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려고 하는데, 이 또한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일이 돌아와 타에코를 막는다. (이 부분을 조금 설명하자면 하루카 이전에 루미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루미는 이를 벗어나고자 하루카의 집에 방화를 저지른다. 타에코가 하루카에게 사과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루미는 자신의 행동이 결국 타에코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를 죽이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그러나 미용사가 꿈인 타에코는 루미로 인해 오른손에 큰 부상을 입는다.)

 

   두 번째로 흥미로운 지점은 이 가해자들이 이토록 잔악하게 변화한 이유에 대한 영화의 시선이다. 2016년 작 <윈드리버>를 보면 인디언 원주민들은 시스템 속에 존재하지만 열악한 자연환경과 사회적 차별로 인해 상처받고 버려진 존재로 비춰진다. ‘윈드리버’라는 공간은 새하얀 지옥으로 작용하며 사람들을 무력감에 빠뜨린다. <미스미소우>의 공간적 배경도 사실은 이와 유사하다.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도쿄를 가고 싶다고 말한다. 


   특히 타에코의 경우 중학교 졸업 이후 도쿄에 있는 미용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말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 좌절하고, 다른 가해자들 또한 ‘이 시골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라며 그들의 행동에 이유를 부여한다. 게다가 대체로 가정환경도 정상적이지 않다. 이것이 폭력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지만 <미스미소우>라는 영화 또한 공간의 잔혹함과 무력감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놓였을 때, 얼마나 잔인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듯 보인다.

      

   마지막 지점은 영화의 결말이다. 원작 만화와는 다르게 영화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남는 것은 모든 문제의 근원인 타에코이다. 최초의 가해자가 살아남아 졸업장을 받고 텅 빈 교실로 돌아와 따돌림 하기 전의 하루카와의 추억을 생각해보며 영화는 끝나는데, 누군가는 이를 타에코가 용서받은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망가졌음은 곧 꿈이 좌절되었음을 의미하며 앞으로 타에코가 살아갈 삶이 정상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불가능하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감독은 ‘생존했다는 기쁨이 이 지옥 같은 공간에 남아 거짓된 삶을 영유하는 것보다 클까’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조금 놀랐던 것은 이 영화가 가진 반전이다.(원작 만화를 미리 본 사람들은 알고 있어서 타격이 크지 않았지만) 꽤나 일본스럽게(?)도 주인공인 하루카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그의 남자친구 미츠루는 영화 후반에서 거대한 멘탈 붕괴를 선사한다. ‘미스미소우(노루꽃)’를 보며 혹독한 시련도 견딜 수 있다고 하루카에게 말하던 그가 알고 보니 얀데레였더라...라는 설정인데 관객의 입장에서 주인공을 제외하고 그나마 정상인처럼 보이던 그가 하루카의 할아버지를 빈사상태로 만들고 ‘네 가족은 모두 죽을 테니 너를 지킬 사람은 나 밖에 없어’라는 말을 내뱉을 때의 충격은 실로 거대했다.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는 복수극을 본 듯한 쾌감보다는 아름다운 장면에 고어를 담아내서 느껴지는 당혹감이나 불쾌함이 더 컸지만, 내용만으로 곱씹어 보았을 때는 나름의 시사하는 바가 있다. 물론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를 선호하지 않는 관객이라면 절대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 김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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