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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May 23. 2018

로디즈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3

바~사의 영화들, 김영찬/정재욱/표국청

<바로네사>, 훌리아나 안투네스, 2017     



   메라는 무언가를 촬영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촬영할지가 정해져야 작동할 수 있는 물건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바로네사>의 카메라는 현재 이 시점에서 다른 어떤 카메라보다 용감한 카메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영화는 대부분 연출된(사실에 기반한) 픽션이라고 감독이 밝혔지만 그 픽션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들은 영화에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영화는 브라질의 한 마을에서 촬영되었으며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철저하게 그동안 카메라가 외면하던 인물들이다. 브라질 빈민가의 여성들에 대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그동안 우리가 소비해왔던 브라질의 갱스터 영화들이 얼마나 유명무실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폭력들로 포장하고 그것을 어떤 시각적 쾌락을 위해 이용하는 영화들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현실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고통을 포장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카메라는 단지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무려 5년간의 공동생활 끝에 영화를 촬영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한 감독은 영화의 외면에 존재하는 폭력들에 대해도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영화 안에 등장하는 폭력들은 영화 외에 존재하는 폭력들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를 만듦에 있어서 철저히 폭력에 대해 경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며 영화밖에 있는 폭력들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바로네사>의 카메라는 폭력을 포장하지 않으면서도 그곳에 존재하는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충분히 강렬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존재들을 위해 카메라를 그곳에 놓은 감독과 제작진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영화는 픽션이지만 촬영 중 일어난 실제 사건들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기도 하는데 마을에서 총격이 일어나는 씬이 대표적이다. 평범한 대화 씬을 촬영하던 중 일어난 총격 사건을 픽션 영화에 그대로 사용한 것은 이것이야 말로 이 곳에서 가장 평범한 대화 씬이라는 아이러니한 효과를 가져다준다. - 표국청

     

<비스비1917>, 로버트 그린, 2017     



   리는 어떠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때 개인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 또는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는 1917년 미국의 탄광촌 ‘비스비’에서 일어났던 이주민 광부 국외 추방 사건을 다룬다. 

    

   단순히 몇 명의 광부가 국외로 추방당한 것은 아니었으며 당시 탄광촌에서 일하고 있던 대다수의 광부들은 이주민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광산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회사를 대상으로 한 파업 중 국외추방을 당하게 된다. 영화는 회사 측의 입장과 파업 도중 추방된 광부 측의 입장을 함께 보여주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며 비스비에 현재 남아있는, 당시 사건을 기억하고 있거나 전해 들은 가족들의 증언을 들려준다.    

 

   국경에 위치해 있는 비스비는 1917년 당시 이주민들이 정착하여 광부로 일을 했었고 당시 세계적인 구리 생산지 역할을 했던 비스비는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회사의 이익이 커질수록 광부들은 자신들에 대한 처우들에 불만을 가지게 되고(노동시간, 임금 등) 당시 사회주의 조직과 연대하여 파업을 주도한다. 이에 대해 회사는 보안관들과 비스비의 주민들을 모아 파업을 주도하는 광부들을 폭력으로 제압하여 멕시코 사막으로 추방해버린다. 추방당한 광부들은 모두 사막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다큐멘터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극영화에서 볼 수 있는 연출적 요소들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연출이 이루어지는 것은 놀라울 일이 아니지만 <비스비1917>은 사건 100주년을 맞이하여 마을 주민들이 100년 전 사건을 직접 재현하는 일종의 연극을 진행하고 그것을 카메라에 담아내었다는 것에서 의미를 가진다.     


   마을에 남아있는 주민들은 지금까지도 회사 측의 입장을 수용하기도 하고 광부 측의 입장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리고 연극을 통해 마을 전체가 10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후 양 측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는 것은 의미가 깊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한 주민은 인터뷰를 통해 과거에 정당했던 어떠한 사건이 현대의 윤리적 기준을 통해서 정당하지 않은 사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 과거의 비스비를 지배하고 있던 광산과 회사 그리고 막대한 이익이라는 가치가 광부들의 추방과 학살을 이끌었다면 지금의 비스비에는 그것이 잘 못 된 일이라는 윤리적 가치가 세워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미국의 정치적 모습과 영화가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이주민에 대한 차별대우와 추방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정세 속에서 <비스비1917>은 하나의 사건을 통해 과거의 가치와 현대의 가치를 논하고 과거의 가치로 회귀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주목한다. - 표국청  

   

<빛의 노래>, 스기타 쿄시, 2017     



   153분의 러닝타임 안에 총 네 편의 영화가 진행되는 옴니버스 영화이다. 각 영화들은 저마다 중심을 이루고 있는 여성 캐릭터가 있으며 네 편의 영화 중 일부는 서로의 영화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1장부터 4장까지 각 장마다 영화의 엔딩 컷을 묘사한 듯한 문장이 표시되고 약 40분의 짧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의 제목이 <빛의 노래>인 것처럼 각 영화마다 노래라는 장치 또는 소재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1.33:1의 화면비로 철저하게 인물의 감정과 공간의 정서에 집중할 수 있게끔 화면을 제공한다. 정적이고 담담하면서도 확실하게 기분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지점이 각 장마다 존재한다. 가장 좋았던 에피소드는 3장이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가 오래전 인화를 맡겼던 사진관에 찾아가 사진을 찾는 주인공이 가게의 사장과 단골손님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가 사진을 찍었을 장소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것을 자제한다. 이는 깊게 파고들어가는 순간에 일어날 인물에 대한 폭력을 경계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3장에서 아버지와 관련한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 부분, 아버지가 과거에 서있었을 공간에서 주인공의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려하지 않는 부분, 4장에서 등장하는 부부가 맞닥뜨렸던 과거의 사건 등 인물이 고통받았을 순간에 대한 것은 지워낸 채 다만 현재를 즐겁게 노래하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이는 한 편으로는 일종의 회피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연출을 통해 인물에게 관객이 깊게 다가가는 것을 그만둘 수 있게끔 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는 이 독특한 따듯함은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영화만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 표국청     


<사라와 살림에 관한 보고서>, 무아야드 알라얀, 2018   

  


   제목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한다. 이 영화는 이스라엘 사람인 사라와 팔레스타인 사람인 살림에 대한 ‘보고서’이다. 영화에서 살림이 팔레스타인 정보국에 잡혀 갔을 때,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레포트를 작성했듯이 어떤 보고서에는 반드시 이를 작성한 주체와 보고서 작성을 주관한 기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누구의 시점에서 작성되었고 어떤 단체 혹은 집단이 주도했는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할 거라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오프닝과 영화의 중반 지점에서 반복되는 동일한 장면은 의미를 가진다. <사라와 살림에 관한 보고서>는 사라와 살림의 시점에서 시작해서 앞서 말한 지점을 지나며 사라의 남편인 다비드와 살림의 부인인 비산의 시점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라와 살림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과 팔레스타인 사람이 사랑한다는-정확히 말하면 불륜 관계에 빠지는-것만으로도 관객은 둘의 관계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전반부에서 관객으로서 내가 집중하게 된 부분은 불륜이라는 도덕적 문제를 제외하고 사회의 문제로 인해서 두 사람의 사랑이 가로막혔다는 지점이었다. 이를 위한 감독의 영리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은 특히 전반부에서는 다비드와 비산에 대한 정보를 최소화함으로써 사라와 살림 사이의 감정에 집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다비드와 비산의 시점- 개인적으로는 비산의 시점이라고 생각하지만-으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감정에 대한 윤리적 문제와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된다. 다비드는 사라가 살림에게 건 단 한통의 전화 때문에 군인으로서 문제가 생기고 비산은 바람을 피운 살림이 이스라엘에 체포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영웅이 되는 현실에 분노를 느낀다. 


   우리의 일상에서는 개인의 윤리적 또는 도덕적 문제인 ‘불륜’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정치적 문제가 개입되며 사회의 담론으로 전환된다는 아이러니함은 특히 비산이 느끼는 혼란스러움과 연결되어 전반부에 만들어 놓은 관객의 감정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따라서 영화의 끝에 다가가면서는 사라와 살림보다는 비산이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고 진실이 정치적인 이유로 가려지는 현실에 안타까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는 아쉬운 선택이 몇 가지 존재한다. 가장 주요한 것이 비산을 왜 임산부로 설정했는가이다. 영화의 가장 능동적 인물이자 감정적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비산을 이러한 상황에 위치시킴으로써 의도적으로 동정심을 유발하려 한다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서 사라와 비산이 같은 공간에 있고 그 옆을 살림이 지나간 뒤, 두 사람이 한 화면 안에 놓으며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제시하지만 화면적으로 좀 더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든다.(특히 영화가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주제나 내용상 불가피한데, 워낙 대단한 영화이다 보니 비교하면 아쉽게 되는 듯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 가보면, 사라와 살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비산과 다비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우리 관객들에게 전달되어 비정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은 어떤 의미일까? 사라와 비산 두 사람의 연대로 보아야 할까? 개인적 의견이지만 사라와 비산을 바라보는 살림의 시선과 곧 이은 회피는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회피하는 비겁한 태도로 보인다. 그다음에 사라와 비산은 한 화면에 위치하지만 그들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어쩌면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와 그들의 옆에 갓 태어난 비산의 아이를 놓음으로써 감독은 해결되기 어려운 이 복잡한 문제에서 살아가야 할 세대들에 대해 그 시대를 먼저 살아왔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미안함을 표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김영찬     



   서사적으로만 보았을 때 히치콕의 사서를 빌려온 듯한 이 영화는, 그 ‘오인’의 서사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국경이 만났을 때, 그 national cinema가 어떤 힘을 가지는지 보여주는 영화인 듯하다. 영화 속 하나의 랜드스케이프로서 등장하는 벽은 철저한 외부인인 필자가 보았을 때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하나의 세계를 가르는 듯 한 이 벽을 넘어서는 순간 언어(그 와중에 그 두 벽의 common ground가 영어라는 지점 또한 흥미롭다.)가 달라져야 하며, 자신의 정의하는 정체성인 이름 또한 가려야 한다. 


   그저 벽을 넘어 택배를 하는 것뿐인데, 영화는 멜로드라마에서 첩보물로 장르를 옮겨 간다. 하지만 이런 영화의 아이러니는 영화의 시작부터 관객에게 밝힌다: “아랍인이야, 이스라엘인이야?”. 영화 속 경찰인 사라의 남편이 이스라엘의 언덕에서 죽은 한 남성을 두고 하는 말. 사실은 그들도 이 밑도 끝도 없는 전쟁에서 누가 죽어나가는지 이제는 모르는 듯하다.      


   하지만 <사라와 살림에 관한 보고서>는 이런 질문에서 끝나기보다는 하나의 해답을 제시해주는 듯하기도 하다. 사라와 살림의 불륜으로 시작한 이 우연스러운 오인의 비극은 그 비극의 피해자들만이 남은 채로 영화가 끝난다. 그것은 사라와 비산이다. 우리는 영화가 끝나며 이 둘의 연대를 기대하게 된다. - 정재욱     



   단순한(물론 세상에 단순한 일은 없겠지만) 기혼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사회적 배경이 스며든다. 영화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치’라고 하는 특별한 상황을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인다. 때문에 관객이 느끼기에 보다 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갈등의 실타래는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꼬여만 간다. 실타래를 풀고자 하는 노력은 실타래를 더욱 꼬이게 만들 뿐이다. 비단 이 에피소드에 한정되지 않고 현재 그들이 사는 사회가 그러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뒷받침하는 것에 비해 영화는 비교적 특별한 부분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사회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없는 필자 역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행동이 가지는 사회적 충격을 인정하지만 조금 더 큰 영화의 틀에서 보자면 이 또한 아직 미진할 뿐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가장 빛나는 부분은 모든 이야기가 결말로 향할 때 보여주는 여성 캐릭터들의 행동에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런 행동이 인물들을 복잡한 갈등 속에 버려두거나 정체하게끔 하지 않고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가치를 지닌다. - 표국청    


 

<스펠 릴>, 필리파 세자르, 2017     



   영화의 시작을 기록에 대한 욕구로 정의해보자. 모두가 알 듯 그림으로 기록하던 어떠한 상(이미지)에 대한 부분을 사진이 대체하였고 사진이 발명됨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대한 기록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의 역사로 시작된 영화가 어떻게 한 국가의 역사적 흐름을 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영화 <스펠 릴>이 보여주고자 하는 지점이다.     


   <스펠 릴>은 기니-비사우의 영화가 어떻게 태동하였는지 그리고 왜 태동하였는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기니-비사우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던 나라로 영화는 기니-비사우의 초기 영화이자 민중해방운동의 지도자였던 아밀카르 카브랄의 육성을 담고 있는, 독립 이전의 기니-비사우를 보여주는 영상기록물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기니-비사우가 현재 처해있는 정치적 상황과 과거 민중해방운동의 전개에 대한 기록이 스크린에 동시에 등장하게 되는데 주로 기니-비사우의 사람들이 아밀카르 카브랄과 관련된 영상을 바라보는 모습들이 담겨있다. 이때 영화는 화면의 한 쪽에 사람들이 직접 보고 있는 과거의 영화를, 그리고 그 뒤편의 배경으로 영화를 보고 있는 현재의 기니-비사우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과거의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현재에 영화를 비추어 바라보게 된다. 중요한 지점은 이로 인해 현재의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비전이 현재에 많이 뒤틀려있음을 인지하게 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서로 토론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행동에 돌입한다는 점이다.   

  

   여전히 남아있는 기니-비사우 내부의 문제와 과거 같은 문제를 두고 행동했던 사람들의 기록이 보여주는 두 개의 영화는 기록이라는 이름의 영화가 시간을 넘어 작동하는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 표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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