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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May 23. 2018

로디즈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4

아의 영화들, 김영찬/정재욱/표국청

<아미코>, 야마나카 요코, 2017   

  


   아미코는 이상한 영화다. 66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약 반년이라는 시간과 그 시간을 넘어선 어떠한 지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시간적 배경 안에는 언제나 아미코가 함께한다. 단지 넓은 시간대를 가진 영화이기 때문에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 보이지 않는 위화감은 우리가 관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련의 ‘영화스러움’을 무시하면서 발생한다. 

    

   영화의 서사는 비교적 가볍다. 사랑에 빠진 고등학생 아미코가 짝사랑 대상인 아오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순간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중반 이후 아오미의 가출이라는 사건을 맞아 아미코가 무작정 도쿄로 떠나 아오미를 찾아가는 내용을 다룬다.     


   영화는 이러한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 안에서 플롯을 흐트러뜨리거나 카메라를 대하는 대상의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특한 편집의 방식으로 전개한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를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가 영화 속 주인공인 아미코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아오미가 가출했다는 사실이 학교에 퍼지게 되는 씬에서 아미코는 같은 반 학생들이 아오미에 대해 떠드는 것을 멀리서 지켜본다. 그러다 같은 반 학생 중 한 명인 마미가 아오미가 학교를 졸업한 연상의 선배 집에서 함께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마자 그에 대한 아미코의 반응이 등장하고 아미코의 반응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등장하자마자 씬이 끝나버린다. 학생들의 반응에 대한 컷은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만 등장하는데 1초도 되지 않는 정말 몇 프레임의 순간뿐이다.     


   영화는 이처럼 아미코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나 아미코에게 사람들이 무언가 말을 건넬 때 의도적으로 이미지가 가지는 시간을 압축 또는 절단해버린다. 이는 주인공인 아미코의 입장에서 듣기 싫은 이야기 또는 짜증이 나는 상황에 대한 이 영화만의 표현방식이다.  

   

   이런 표현방식과 함께 영화에 등장하는 몇몇 뜬금없는 장면들, 예를 들자면 지하상가에서 갑작스레 일면식도 없는 연인을 데려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나 거리에서 세상을 향해 욕을 퍼붓는 사람과 함께 욕을 퍼붓는 아미코의 장면들은 말 그대로 아미코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으로서 지극히 충동적이고 극단적으로 순수한 아미코의 정서를 그대로 표현해 낸다. 

    

   영화라는 매체가 감독이 원하는 대로 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감독의 말은 마치 영화를 가지고 재미있는 놀이를 하였다고 말하는 느낌을 주는데 그 놀이의 주체는 바로 ‘아미코’라는 인물이었으며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아미코가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이야기대로 흘러간다.     


   ‘영화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이렇게 자유분방한 권한을 준 적이 있었을까?’라는 기분 좋은 의문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 표국청     


<앵커>, 최정민, 2018  

   


   영화의 제목인 앵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육상 계주 경기의 최종주자 역할을 의미하는 앵커와 배에 달려있는 닻으로서의 앵커. 영화는 육상부 선수인 한주의 이야기를 다룬다. 할아버지, 하반신 장애를 가진 남동생과 살아가는 한주는 자신을 도와주던 목사(사기꾼)의 사기에 속아 할아버지를 잃고 영준마저 실종되는 상황에 놓인다.   

  

   영준의 실종 이후 영화는 한주가 영준을 찾는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영준의 행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한주의 옆에서 영준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한주의 모습을 담는 것에 집중한다. 필자는 <앵커>라는 영화가 가지는 유의미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영화가 끝까지 파고들지 못하고 회피해버린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스스로를 위해서 그리고 글을 읽어줄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 더 유익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였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준의 실종 이후 한주가 영준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한주는 영준이 갔을만한 곳을 찾아가거나 영준을 납치했을 것이라고 의심되는(한주 자신이 의심하는) 인물을 추적하며 영준의 행방을 쫓는다. 한주의 이러한 노력들은 각 노력의 끝마다 어떠한 결과들을 가져오지만 한주가 원하는 영준의 행방과는 거리가 먼 결과들이다. 한주의 주변인들은 그런 한주의 노력을 그만두게끔 하거나 오히려 한주의 책임으로 전가해버린다.     

 

   <앵커>는 명백하게 한국의 사회상을 다룬다.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 개인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그 해결을 결국 개인에게 미루는 방식과 사회 구성원들이 개인에게 저지르고 있는 수많은 폭력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때문에 영화는 필연적으로 우리 사회의 거울 역할을 한다.  

   

   필자가 영화에 대해 큰 아쉬움을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 한주의 피로함과 분노 그리고 슬픔을 함께 느끼게 된다. 영준을 위해 뛰고 또 뛰는 한주의 노력이 허무한 결과들로 돌아올 때는 말 그대로 ‘지친다.’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지독히 경험했던 감각과 맞닿아 있다. 문제에 대하여 인지하고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결국 이것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함.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이 무기력함 안에 갇혀 살았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충실히 재현할 뿐 어떠한 해결점을 내놓지 못한다. 물론 영화가 어떠한 사건에 대하여 해결점을 제시할 의무를 가지지는 않는다. 다만, 현실에 대한 재현이라는 말로 개인이 받은 고통을 전시해놓고 카메라는 유유히 그 현장을 빠져나오는 영화를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영준의 납치범으로 몰려 도망치던 한주가 이름 모를 할머니의 집에서 밥을 먹으며, 심지어 울면서(카메라는 밥을 입 안에 가득 넣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한주의 모습을 타이트한 샷으로 보여준다.) 외치는 “사람들은 계속 가만히 있으라고만 한다.”라는 대사나 종국에 영준을 찾지 못하고 단지 영준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바다를 바라보며 “거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누나가 꼭 찾으러 갈게!”라고 외치는 장면(한주는 바다를 바라보며 외친다. 그리고 그 옆으로 보이는 앵커.), 영화 안에서 끝까지 고집스럽게 보이는 고통받은 개인의 노력들은 우리의 무기력함이 절정에 달했던 우리의 사회와 그중에서도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만들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관객이 관찰하게끔 한다.     


   물론 바다에서의 외침 이후 등장하는 라스트 씬에서 한주는 남들이 정한, 또는 우리가 정해놓았을 정해진 길을 달리지 않고 스스로가 원하는 장소를 향해 달려간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달려가는 인물을 보여주던 영화가 영화의 끝에서 인물을 다시금 달리게 만든다고 해서 영화 내내 느꼈던 일말의 고통들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인물은 다시 말해 개인은 또다시 스스로의 힘으로 어딘가를 향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진행된 GV는 영화가 어떠한 해소를 위한 것이 아닌 사회에 대한 철저한 재현에 집중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감독은 영화가 세월호를 연상하게끔 한다는 질문에 시나리오 작성부터 촬영 기간까지 세월호에 대한 것을 염두해두지 않았으며 사회에 대한 모습을 그리려 노력하다 보니 그렇게 느꼈을 수 있다는 대답을 하였다.     


   사회상을 재현하면서 사회를 이루는 가장 큰 사건을(하물며 영화 속에 나오는 무수히 많은 은유들이 세월호를 가리킴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다루는 방식에 대해 감독의 태도가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러한 태도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럴 권리 역시 필자에게는 없으나 ‘영화가 아쉽게 다가오는 점은 이런 것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 표국청   

  

<예조 : 산책하는 침략자 극장판>, 구로사와 기요시, 2017     



   기요시 감독의 작품들을 볼 때면 작품이 가지는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구현하는 연출 능력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예조 : 산책하는 침략자 극장판>은 원래 TV 드라마로 만들어졌었던 작품으로 이후 극장판 제작이 되었다. 영화는 ‘외계인이 침략전쟁을 진행하기 이전에 인간들을 대상으로 정보전을 한다.'라는 상황을 흥미롭게 연출해낸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바로 ‘개념’이라는 것인데. 외계인들은 인간에게서 이 개념을 빼앗아 인간 자체를 학습하고 그 학습을 바탕으로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내려 한다. 외계인들은 인간의 몸을 빌려 사회 속에 섞여있으며 그들은 각자 ‘가이드’라는 존재를 두어 가이드가 선택한 인간에게서 개념을 빼앗는다. 영화는 외계인 중 한 명인 마카베와 그의 가이드인 테츠오, 그리고 테츠오의 부인이자 외계인에게 개념을 빼앗기지 않는 인류로 등장하는 에츠코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속에서는 외계인의 침략으로 은유되었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에 대해 생각하는 존재인가를 다룬 작품으로 보인다. 개념을 외계인에게 빼앗긴 인물은 그 개념과 연관된 삶의 축이 무너지게 되는데 예를 들어 가족이라는 개념을 빼앗기게 되면 가족에 대한 이해 자체가 불가하며 동시에 가족이라는 사회조직 내에서 학습된 사회성이 결여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개념이라는 말로 정의된 인간의 사유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개념들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이러한 개념이 사라지게 하는 것은 비단 영화 속 외계인뿐일까?’라는 의문을 잔뜩 불러일으킨다.    

 

   또한 외계인이라는 다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에 대한 묘사와 점점 더 갈등이 깊어져 가는 인물들 사이의 관계성, 주인공인 에츠코가 주어진 상황들을 파헤쳐 나가는 지점들을 연출하는 감독 특유의 이질적인 느낌과 기괴한 샷 구성은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 표국청     


<워크숍>, 로랑 캉테, 2017           



    ISIS의 테러와 유럽 각 국가들의 경제적 문제, 난민 문제와 브렉시트까지. 최근 몇 년간 유럽 연합은 공동체로서의 정체성 문제와 각 나라들의 정체성 사이의 괴리, 그리고 유럽 연합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 왔다. 특히 작년 프랑스 총선이나 올해 초의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극우 정당의 세력이 확연히 강해졌음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난민 또는 불법 이민자들과 겪는 갈등과 유럽 청년 실업률 문제 등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클래스>라는 영화로(비록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던 로랑 캉테 감독의 이번 영화인 <워크숍>(또는 아뜰리에)은 유럽의 청년세대와 기성세대가 겪고 있는 갈등과 함께 현재 프랑스의 교육 문제에도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특히 올리비아와 앙트완, 그리고 다양한 학생들의 토론은 마치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촬영되어 긴장감과 생동감을 동시에 전달한다.     


   이 영화에 대해 조금 더 말하기 전에 2017년 칸에서 황금 종려상을 차지한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더 스퀘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더 스퀘어>는 여러 겹의 이야기가 쌓여있지만 가장 먼저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크리스천이 자신의 핸드폰을 도난당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핸드폰이 한 외곽 도시의 아파트에 있음을 확인한 크리스찬은 모든 집에 핸드폰을 돌려놓으라는 협박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이 편지로 인해 오해받아 외출 금지를 당한 소년이 크리스찬을 찾아와 사과를 요구한다. 크리스찬은 매몰차게 아이를 내치고, 영화의 끝에서야 죄책감을 느끼고 사과를 하러 다시 소년을 찾아가지만, 이미 소년의 가족은 떠나고 없다. 이 중심 스토리 이외에도 영화는 다양한 유럽의 문제들을 다룬다. 예술의 광고를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게 가능한지, 테러의 두려움이 만연한 공간에서 편견의 제거는 가능한지, 소위 말하는 ‘고상한 자들’은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 내밀 수 있는지 등의 이야기를 적나라한 블랙 코미디로서 보여준다.     


   <워크숍>도 이러한 고민들로부터 시작한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설 쓰기 선생님인 올리비아는 파리에서 작가 생활을 영위하다가 시골인 시오타로 내려온 사람이다. 시오타는 프랑스 남동부의 시골 해안마을이며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과거에 거대한 조선소가 있었고, 조선소의 폐업을 막기 위해서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던 곳이다. 초반부에 올리비아에게 한 학생이 말했듯 ‘조선소는 과거의 거대한 괴물’ 일뿐, 지금 세대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반면 앙트완을 비롯한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직업을 구하는 중이거나, 파리처럼 큰 도시에서 구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빗대어 말해보자면 완전 대기업은 아니어도 또 중소기업은 아닌, 그런 회사에서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올리비아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가 시골에서 쉬면서 돈을 벌려고 왔다는 나쁜 말들이 초반에는 주를 이루는 것이다. 


   앙트완은 어떤 사람인가. 그에게 유일한 오락거리는 게임과 프랑스 군 홍보 영상들을 보는 것이다. 몇몇 친구들이 있지만, 그들을 과연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앙트완은 그들 틈새에서 일종의 거리감을 느끼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수영할 때를 말고는 앙트완이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순간은 없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감독이 <워크숍>의 토론 장면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고전적이긴 하지만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그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론의 과정에서 앙트완은 계속해서 편견과 차별로 점철된 말들을 쏟아낸다. 물론 ‘릴에서 하얀색 밴을 보면 무서움을 느낀다’는 말처럼 현재 유럽에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편견을 작용시키는 사람도 존재한다. 로랑 캉테는 학문을 위한 공간 내에서 이러한 생각을 발화하는 것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올리비아는 토론의 중재자이자 선생님으로서 앙트완의 이러한 발언들을 막는다. 하지만 올리비아 또한 앙트완에 대해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하기 어렵다. 심지어는 자신의 다음 작품을 위해 앙트완을 인터뷰하는 올리비아는 청년을 더 나은 길로 인도해보려는 기성세대라기보다는 청년세대를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이용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앙트완이 총을 들고 올리비아의 집을 찾아오는 후반부의 장면은 더 중요해진다. 앙트완은 자신의 말로 다른 친구들에게 상처를 줬지만, 뭐가 잘 못 된 지를 모른다.(또는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올리비아는 그런 앙트완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고, 다시 앙트완에게 상처를 주었다. 앙트완이 총을 들고 와 올리비아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올리비아는 앙트완에게 좋은 말들을 건네며 살려달라고 말한다. 영화의 오프닝(게임 장면)과 유사한 공간에 도달했을 때, 앙트완은 올리비아를 보내고 게임 캐릭터가 그랬듯이 달에 세 번의 총을 쏘고는 총을 버린다. (언젠가 이 부분에 대해서도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영화의 막바지에서 앙트완을 제외한 다른 학생들은 워크숍을 통해서 변화를 겪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했던 학생도 열심히 참여하고,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단지 앙트완만 거기서 빠져있을 뿐이다. 그때 앙트완은 자신이 쓴 글을 가져와 모두의 앞에서 읽는다. 그 글은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이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며,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아직 알지 못하는 청년의 방황에 대한 노래인 동시에 자신이 말과 총으로 행한 폭력에 대한 반성이다. 그리고 그는 영어를 쓰는 어딘가로 일을 하러 떠난다. 이 또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정의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찾기 위한 앙트완만의 여정일지도 모른다.      


   특히 프랑스에서 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토론식 교육이 가지는 문제점(한국에서 학생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이 문화 자체가 부럽기도 하지만)과 기성세대의 청년세대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중심으로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는 <워크숍>은 앞서 언급했던 <더 스퀘어>와 그 주제적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지금 유럽 연합은 어느 지점에 도달해 있는가? 유럽 연합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연합을 구성한 나라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가? 왜 유럽의 청년 세대들은 혼란을 겪고 있는가? 단순히 유럽 연합을 넘어, 인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 김영찬     



   로랑 캉테의 <워크숍>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를 교육의 현장으로 데리고 간다. 그의 영화를 보면 개인적으로 필자는 항상 너무 큰 괴리를 느낀다. 외국에서 생활을 오랫동안 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대부부의 교육 시스템을 한국에서 지낸 필자로서는 사실 <더 클래스>에서의 교육현장이나 이번 <워크숍>에서의 교육현장을 보고 있자면 부러움의 감정부터 먼저 든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어떤 질투심의 감정을 안고 영화를 볼 수밖에 없다. 가령 이 영화 속 인물들이 나누는, 소위 “배운 게 없어요.”하는 그 순간조차도 어느 정도의 부러움의 감정을 필자는 안고 간다.     


   하지만 필자와는 관계가 먼 사회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제쳐두서라도 로랑 캉테는 분명 영화 마스터이고 씨네아스트이다. 학생들이 모여 토론을 하는 장면은 말이 칼과 방패가 되어 싸운다. 이런 시퀀스들은 웬만한 액션 씬보다도 몰입도가 높으며, 우리는 토론의 끝에 누가 피를 흘리며 그 전장을 떠나가게 되는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분명 그 피를 흘리며 떠나가는, 홀로 남은 앙투안에 대한 이야기다.      


   2018년을 살고 있는 아이들은 분명 미래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많이 다를 것이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도 격변의 시기 이도 하지만, 그 격변의 시기의 서막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의 상처로 우리의 뒷세대에 평생 남아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러한 사건들이 우리가 <워크숍>이라고 하는 영화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방식일 것이다. 결국 이 영화 속 아이들도 프랑스가 최근 몇 년간 테러의 피해자들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앙투안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 또한 이 시대의 피해자라는 시선 말이다. 

    

   영화의 시작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 게임(더 위처 3)의 플레이 영상으로 시작을 한다. 게임 속 아바타는 설원을 달리다가 갑자기 태양을 향해 화살을 쏘아대는 무의미한 행동을 한다. 조금은 게임 속 세계의 언어를 빌려온다면, 만렙을 찍은 용사가 더 이상 게임에서 이룩할 것이 없어하는 무의미한 행동들이다. 필자 또한 게임하는 것을 즐겨하지만, 특히 RPG 게임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런 플레이어들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게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게임으로 돌아가 아무런 의미 없는 행위들을 계속해 나간다. 마치 이미 끝난 게임 속에서 마법처럼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듯이 말이다. 이를테면, 허무함을 붙잡으려는 노력처럼도 보이기도 하고, 자신이 실존함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이 쇼트를 시작으로 앙투안이라는 인물을 소개받는다.     


   <워크숍>의 중심인물들은 분명 워크숍을 연 올리비아와 앙투안이다. 하지만 영화를 끝나고 나면 이상한 것은 우리는 그 둘에 대해서 가장 아는 것이 없다. 분명 카메라는 이 둘을 집중해서 보여주지만, 우리는 오히려 영화 속 다른 학생들의 전사를 더 잘 알게 된다. 그들이 워크숍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에는 분명한 전사와 이유가 존재하고 우리는 그들이 토론을 하는 장면들을 통해서 오히려 그들의 배경을 더욱 자세히 안다. 다시 말해, 앙투안과 올리비아의 모습이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이 담겨지지만, 그들의 행동에는 어떠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다. 우리는 끝끝내 앙투안 왜 그러한 말들과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올리비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 정재욱     



   영화의 시작 지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 시작 지점을 종국에 이야기의 결과 일치시키는 감독의 노련함에 감탄한다. 영화는 유명 게임의 플레이 장면으로 시작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영화 속 인물의 모습이 아닌 철저히 게임 플레이 영상이다. 여기에는 게임에 포함되어 있는 사운드와 화면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개입하지 않는다. 게임의 캐릭터는 말을 타고 이동하다 말에서 내리고 칼을 허공에 휘두르고 겡미 상에 떠있는 태양을 향해 활을 쏜다.     


   태양을 향해 무언가를 쏜다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1940년대 소설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너무 더워서 태양을 향해 총을 쏘았던 이방인처럼 영화는 어째서 자신이 그러한 행위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청년 앙투완의 이야기를 다룬다. 앙투완의 주위를 둘러싼 환경. 즉, 유명 작가의 아래에서 공동으로 소설을 집필하는 워크숍이라던가 절친한 친구들과의 ‘놀이’, 정치적 입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치인들은 앙투완에게 무언가 행동하게끔 하지만 결과적으로 앙투완은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거나 하는 의식이 없다. 단지 충동적일 뿐이다. 마치 영화의 다른 한 축에 서있는 유명 소설가 올리비아가 꿈꾸는 이상적인 소년의 모습으로 말이다.     


   앙투완이 자신의 SNS에 올리는 절벽에서 다이빙하는 영상에 대해 올리비아는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바라봐 주길 원하니?”라던가 “그로 인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거지?” 등의 질문을 하지만 앙투완은 대답하지 못한다. 아니, 대답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저 행동했을 뿐이다.    

 

   영화의 종국에 결국 앙투완은 달을 향해 총을 쏜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의 조직. 워크숍에 어울리지 못한 것에 대한 자신의 변호를 글로서 이루어 낸다. 이방인에 대한 현대판 해석으로서 이방인은 하나의 사회 공동체에 대한 반항임과 동시에 그 사회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는 것에 비하여 워크숍의 앙투완은 결국 자신을 사회에 맞추어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한 판단은 잠시 보류하자, 이후 앙투완의 삶은 계속될 것이고 그의 행동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결국 다시 게임으로 돌아와 보자면. 이방인의 주인공이 하지 못했던 사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낼 수 있는 장이 바로 게임의 세계이다. 게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욕망에 의해서 또 충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점점 더 게임에 가까운 세계로 다가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표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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