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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모임 로칸디나 May 23. 2018

로디즈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5

자~하의 영화들, 김영찬/정재욱/표국청

<제멋대로 떨고 있어>, 오오쿠 아키코, 2017      



   이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로 분류되어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제멋대로 떨고 있어>는 전혀 로맨틱하지 않아서 그렇다. <제멋대로 떨고 있어>는 현대인들의 성장 영화이다. 사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좋은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려웠는데 이 기회를 빌려 글로 생각을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요시카는 26세까지 흔히 말하는 ‘모태솔로’로 10년간 짝사랑한 이치(1)를 항상 마음에 두고 있다. 그는 본능을 따라 고백하는 것이 천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10년 동안의 감정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요시카는 사실 거절당하는 게 두려운 것뿐이다. 그의 취미는 위키피디아에서 멸종 동물의 목록을 살펴보기이다. 


   심지어는 거금을 들여 박물관에서 판매로 나온 암모나이트 화석을 사기도 한다. 그녀가 멸종 동물들 중 암모나이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극 중에서 이렇게 소개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껍데기를 만들었지만, 이것이 결국 이상 형태가 되어 멸종하게 되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요시카도 그렇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멸종할까 봐 두려움을 느낀다.


   갑작스러운 회사 동료의 고백 이후, 요시카는 그가 숫자 2를 이상하게 쓴다고 해서 니(2)라는 별명을 붙인다. 이후 이치와 니 사이의 감정에서 고민하던 요시카는 집에 화재가 나 죽을 뻔한 위기를 거치고 나서 비로소 ‘본능’에 따라보기로 결심한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 이치를 만난 요시카는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 비슷한 취향,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던 이치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요시카의 세계는 붕괴된다. 


   영화는 그 순간 앞서 제시된 모든 상황이 요시카가 만들어 낸 세계의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또한 자신에게 필요한 말을 했을 뿐 누군가와 소통을 한 적이 없고, 이웃, 회사 사람들에게 별명을 붙여 자기가 편하게 외웠을 뿐 그들을 이름으로 불러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요시카는 니와의 만남을 통해 변화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니가 요시카에게 다가가는 방식도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회사 동료로부터 들은 정보를 통해서 접근해 온 사실을 알게 된 요시카는 회사를 그만 둘 각오로 휴가를 내고 집에서 은둔한다. 니에게 너무 잔인하게 말한 게 걸렸던 요시카는 그를 집으로 불러낸다. 그리고 그때 니는 온 진심을 다해서 요시카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요시카는 니에게 말한다. “제 멋대로 떨고 있어.” 


   앞서 말했듯이 영화는 요시카의 세계가 무너지기 전과 후의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영화는 모두 요시카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전반부에서는 따듯한 분위기가 주를 이루는 반면 후반부에서는 화면의 느낌 자체가 차갑고 어둡게 느껴진다. 전반부에서는 요시카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과 (일방향적) 소통하는 리듬감을 좋은 점으로 꼽고 싶다. 물론 일부분 스타일의 과잉스러움이 있지만,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와 재치 있는 대사들이 빛을 발한다. 후반부의 경우 이치를 만나러 갈 때는 배속(Fast forward)으로 편집하고, 이치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일반 속도-에서 살짝 느리게 편집한 것도 독특한 포인트이다. 


    영화는 이제 단순히 요시카라는 한 인물의 성장담으로 보이지 않는다. 요시카뿐 아니라 이치도 비슷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관객이 마주하는 순간, 영화는 많은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소통의 문제로 나아간다.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암모나이트처럼 벽을 치지만 나라는 존재가 사회 속에서 의미 없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요시카의 모순된 감정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제목이자 마지막 대사인 “제 멋대로 떨고 있어”가 힘을 얻으며 영화에 힘을 부여한다. 일본어를 잘 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이 말은 일본어에 존재하는 독특한 문법 형식인데 명령조 아닌 명령조라고 한다. 


   니와 요시카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서로의 진심을 표현할 때, 니에게 던지는 요시카의 말은 “너의 감정-또는 본능-이 원하는 걸 표현해 줘”라는 이야기로 바꿔 생각해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요시카 또한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리 마음에 껍데기를 씌워도, 사랑이란 감정이 피어날 때 몸의 떨림은 숨길 수 없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그게 우리 현대인을 멸종으로부터 구원할지도 모르니까. - 김영찬     


<졸업>, 허지예, 2018     



   전주에서 세 번째로 만난 영화는 허지예 감독의 <졸업>이었다. 감독이 그려낸 한국 청년세대의 모습을 그린 영화는 아쉬운 지점도 있었지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졸업>은 졸업을 앞둔 대학생의 어머니가 지방으로 떠나길 결심하면서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청년이 느끼는 불안감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담아낸 작품이다.      


   주인공 해랑은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프로덕션 디자인을 전공하고, 영화 세트장 아르바이트와 카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준비하지 않았던 독립을 잘 해내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감독은 해랑의 노력-또는 한국의 20대의 노력-을 밝은 화면으로 보여주며 해랑을 응원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중반부를 지나면서 해랑은 자신의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적당한’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꿈을 좇기가 어렵다는 걸 느낀다. 이 영화에서 가장 힘 있는 지점은 여기서 터져 나온다.    

  

   해랑 역을 맡은 이태경 배우가 1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어머니와 전화하는 장면인데,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이태경 배우의 얼굴 표정과 목소리만으로 감정을 전달해낸다. 허지예 감독은 끝에 이르러 아직까지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꿈을 향해 온전히 도전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럼에도 꿈을 위해 노력하는 청춘을 응원한다. 


   <졸업>에서 아쉬운 지점은 두 가지이다. 먼저 김소라 배우가 맡은 은아라는 캐릭터를 조금 더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주인공인 해랑도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가는 건 은아였다. 해랑과 달리 부모님의 울타리 밖에서 먼저 나와 홀로서기를 하는 은아는 항상 밝고 해랑에게 힘이 되는 존재지만 한편으로는 ‘굶으면서까지 이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라며 공무원 시험 교재를 산다. 독립을 시작한 해랑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지쳐가는 데 비해 은아는 어떻게 그렇게 밝은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는지, 은아는 왜 일찍부터 지원을 받지 않는지 여러 궁금증이 떠올랐지만 끝까지 밝혀지지는 않는다.    

  

   두 번째 아쉬움도 이러한 맥락에서 연결된다. 결국 해랑은 어머니의 지원을 받아 꿈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현세대들에게 부모의 지원이 없다면 꿈을 좇을 수 없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씬에서 해랑과 은아는 새로운 두 사람의 집을 다시 꾸미고, 벽에 그들의 습작을 붙인 뒤 가운데에 둘의 사진을 붙인다. 이때, 영화 전반을 통해 받아들인 해랑과 은아에 대한 정보로 인해서 오히려 두 사람을 응원하기보다는 해랑은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잘 될 가능성이 있지만 은아는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라는 의문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허지예 감독이 <졸업>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 대한 공감과 응원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가끔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보다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듯해지는 영화를 만나고 싶을 때도 있다. - 김영찬     


<폭스트롯>, 사무엘 마오즈, 2017    

 


   선택에 대한 영화라고 이야기해보자. 선택의 순간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그 순간 우리는 어떻게 선택을 하는가 그리고 그 선택은 어떤 결과(또는 또 다른 선택)를 야기하는가. 보편적인 주제를 이야기하지만 영화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맞닿아있다. 단순히 영화가 감독의 자전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감히 이 영화에 감독이 속한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의도적이거나 또는 그렇지 않게 녹아들어 있다고 단언한다. 이는 결국 인간의 선택에 대한 결과가 결코 단순하게 따라오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동반할 수 있게 한다.     


   왜 낙타였을까? 영화에 낙타가 등장한다. 낙타는 시퀀스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시퀀스를 봉합하는 역할을 한다. 심지어 너무 적절한 낙타의 등장은 시퀀스가 환상의 경계를 넘어가게끔 만든다. 또한 낙타는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미로, 즉 사막을 파헤치는 유일한 존재다. 낙타를 보면 영화적이라고 느껴버리는 나로서는 이 선택이 너무 좋기에 감독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궁금하다. - 표국청    

 

<항해사의 세 개의 왕관>, 라울 루이즈, 1983     



   먼저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를 보기 전 세 개의 왕관이 뭘까 고민한 나로서는 영화를 보는 내내 왕관의 이미지를 기다리기도 했으니. 사실 왕관-crown-이라는 번역은 잘 못한 번역이다. 영화의 항해사 또는 선원이 찾는 건 3개의 덴마크 크로네(danish krone)이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당시 크로네에 왕관 그림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이를 세 개의 왕관으로 번역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의 감정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영화의 끝까지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환상적인 이미지와 쇼트들이라니! 도대체 라울 루이즈라는 감독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 궁금증만 커졌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다음 날 <길 잃은 드라마> 상영 뒤에 시네마클래스의 말을 조금 빌려야 할 것 같다.      


   라울 루이즈는 칠레 출신 감독이다. 그는 원래 칠레에서 영화를 찍다가 칠레가 군사정권의 독재 하에 놓였을 때 유럽으로 망명하였고 그 뒤 90년대에 이르러서야 칠레로 돌아왔다. 그래서 보통 그의 영화는 행적에 따라 3기로 구분된다. 칠레에 있던 1기에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이야기하고 망명기인 2기에는 1기의 경향성에 더해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더해진다. 이 과정에서 그는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여 영화의 공간이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칠레에 돌아온 3기에는 자국의 현실이 얼마나 일그러져있고 비현실적인지를 보여주는데 이 과정에서 환상성은 극에 달한다.  

    

   <항해사의 세 개의 왕관>은 프랑스에서 제작된 영화로 2기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인 대학생은 죄를 저질러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고, 돌아가고 싶은 항해사는 다양한 이유로 인해 집에 갈 방법을 잃거나 잊었다. 결국 영화는 불가피하게 고향을 떠나야 하는 자와 돌아가고 싶은 자의 이야기를 통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보여준다.      


   이야기의 결은 미로와 같이 복잡해서 글로써 설명하는 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길 잃은 드라마>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겠지만, 루이즈 영화의 환상 속에서 관객은 미아가 되고, 유령이 되어 이야기를 헤매어도 괜찮기 때문이다. - 김영찬     


<해피엔드>, 미하엘 하네케, 2017     



   시대가 발전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뀌어 감에 따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바뀌어 왔다. 가령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서사의 영화가 당시에는 마음을 울리는 명작이었을 수도 있으나 지금에 와서는 시대상에 맞지 않는 서사라는 평가를 받는 사회적 윤리에 대한 문제부터 과거에는 냇물에 빨랫감을 가지고 와 빨래를 하며 옆집에 사는 사람과 대화하는 장면이 주요했다면 지금에 와서는 홀로 세탁기를 돌리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 속 삶의 모습이 바뀌는 것은 결국 영화의 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샷의 구성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피엔드>는 이 점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다. 70대 중반의 세계적 거장 미하엘 하네케는 그 누구보다 가장 현재에 가까운 영화문법을 영화 내에서 뽐낸다.    

 

   영화는 핸드폰 화면, 아니 스마트 폰의 화면으로 시작한다. 그 넓은 스크린에 가로는 모두 잘려나가고 세로로 길게 남아있는 스마트 폰 화면. 그리고 한 여성이 화면에서 잠들기 전 양치를 하고 머리를 빗고 볼일을 보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면의 한 쪽 구석을 메우기 시작하는 말풍선들. 마치 SNS 라이브 방송을 연상하게 하는 이 말풍선들은 여성이 행하는 행동들을 하나하나 묘사하기 시작한다. 마치 그 여성을 자신이 통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처럼.    

 

   이후 핸드폰 화면이 몇몇 이어지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라고 인식할 수 있는 화면으로 돌아왔을 때 그 화면은 건설현장의 벽이 허물어지는 사고를 보여준다. 영화는 세계적인 기업인 로랑 그룹의 건설현장 사고로부터 시작하여 로랑 집안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파헤치기 시작한다. 서사 자체에 대한 차별성을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평범할 수 있는 서사이지만 여기에 한 존재, 로랑 집안의 아들이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아 로랑 집안과 떨어져 살아온 ‘이브 로랑’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굉장히 흥미로워진다.     


   이브의 존재는 마치 카메라의 시선과 맞닿아 있다. 집안 곳곳의 문제를 바라보는 (집안의 자식, 불륜 문제와 이브의 할아버지인 조지 로랑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생각 등) 카메라와 이브의 시선은 종종 일치한다. 영화는 결국 집안의 모든 인물들이 가지는 개별적 사건과 집안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계급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걸 바라보는 이브의 이질적인 시선을 주목한다. 그리고 이 이브라는 소녀가 가지고 있는 뒤틀린 욕망. 사람을 통제하고 싶다는 욕망은 카메라의 그것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이브의 욕망은 주로 스마트 폰 화면이나 유튜브 화면 등 비교적 최신의 영상 컨텐츠로 비추어진다. 물론 스마트 폰과 SNS의 등장 이후 이러한 화면을 사용한 영화들은 많았다.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거나 또는 어떤 존재와 마주하게 되거나 공포에 빠지게 되거나 즐거움을 느끼거나 어떤 영화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유튜브 컨텐츠처럼 구성되어 있거나 SNS의 화면으로 대체되어있기도 하다. 하지만 <해피엔드>가 이러한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가지는 차별점은 이러한 화면을 단순히 소재를 드러내기 위한, 또는 삶의 모습을 모방하기 위한 화면으로 이용하는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피엔드>는 엄밀히 말하여 이러한 화면들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이다. 하지만 감독이 이러한 화면을 넣은 것은 소녀의 뒤틀린 욕망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제시임과 동시에 SNS가 가지는 본질에 대한 통찰이 뒷받침된 판단이다.     


   영화의 종국에 스마트 폰을 들어 올리는 이브와 그런 이브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인물들. 비교적 최신 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영상을 어떻게 소모하는가에 대한 뼈아픈 장면임과 동시에 유쾌할 수 없지만 너무나 유쾌한 장면이기도 하다. 결국 새로운 영상시대에 대한 감독의 태도가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 표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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