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모임 로칸디나 May 28. 2018

로디즈가 만난 영화 <버닝> 2

<버닝>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김영찬

   <버닝>, 이창동, 2018


   하얀 뱀은 5월 17일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신작 <버닝>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서 게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얀 뱀의 일원 중 한 명인 표국청의 글을 시작으로 하얀 뱀의 구성원들이 이야기하는 <버닝>이 여러분을 찾아올 예정입니다.


(본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작품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생각을 바탕으로 한 감상임을 밝힙니다.)


<버닝>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_김영찬 


   이창동 감독의 <시>가 개봉한지도 8년이 지났다. 그간 한국 사회는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 속에서 이창동 감독은 어떤 모습을 본 것일까. 그리고 어떤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이창동 감독의 사실적 접근   

  

   이창동 감독은 한국 사회를 사실적으로 조망하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초록 물고기>에서 <박하사탕>을 거쳐 <시>까지 그의 작품들은 항상 관객을 한국 사회의 어딘가에 위치시키며 피부로 인식하도록 했다. 이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통해 관객이 한국 사회를 무언가 낯설게 느끼도록 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반대의 방식이며 그렇기에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볼 때 어떤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버닝>을 보면 이창동 감독은 한국의 젊은 세대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다분히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종수나 큐레이터 아르바이트를 하는 해미의 모습, 비슷한 나이임에도 나와는 다른 계급에 위치한 벤을 보며 느끼는 경원함과 동경, 그리고 분노. 벤이라는 캐릭터의 웃음과 대사 등 분명한 한계와 아쉬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창동 감독 나름의 방식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접근한다.      


<버닝>이라는 영화     


   모든 이야기에 앞서, 이 영화가 절대로 한국 청년 세대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버닝>은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주인공일 뿐, 그 안에는 또다시 한국의 현대사와 한국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다. 따라서 과거의 세대에게는 그들이 만들어 낸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오작동하고 있는가를, 지금의 세대에게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 질문하며 화두를 던지는 영화로 보인다.  

     

   <버닝>을 보는 내내 생각났던 영화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L’avventura>(한국 제목 <정사>)와 <Blow up>(한국 제목 <욕망>)이었다. 주인공이 중간에 사라진다는 플롯은 안토니오니의 <L’avventura>에서 사용된 바 있고, 해미가 판토마임을 하는 장면은 <Blow up>의 오마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Blow up>의 마지막 씬은 얼굴에 흰 분장을 한 젊은 사람들이 테니스장에서 라켓도 공도 없이 테니스를 치는 행위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그들을 관찰하다가 어느 순간에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 테니스공이 있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간 공을 그들에게 다시 던져준다.      


   <버닝>의 판토마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해미는 ‘귤이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 비로소 (상상 속의) 귤이 어떤 맛인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버닝>은 그런 영화다. 영화는 무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의 종수와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잊은 종수의 행동들로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해미와 종수그리고 벤     


    결핍을 공유하고 있는 해미와 종수는 같은 듯 보이지만 다르다. 해미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하려는 사람이다. 그는 몸 쓰는 일이 좋다고 말한다. 어디서든 자신이 원한다면 춤을 추는 사람이다. 해미에게 부족함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은 행동이다. 그러나 해미의 행동은 현실의 굴레에 얽혀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해미는 팬터마임 같은 삶을 살고자 한다. 자신이 사회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식되기보다는 그 사실마저 망각된 존재로 소멸하고자 한다.     

 

   종수는 이 지점에서 해미와는 정 반대의 위치에 있다. 종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다. 그러나 세상이 명백하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행동하지 못한다. 사실 영화 전체적으로 종수가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어떤 사건의 리액션으로서 일어난다. 다시 말해, 종수는 행동할 수 없는 인간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의 ‘룸펜 지식인’이 사상적 목표는 있었지만 사회적 문제 인해 무기력해지는 것처럼, 종수는 자신의 소설 쓰기라는 행동을 옮기지 못한다.     


   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문제는 약간 복잡해진다. 벤은 해미, 종수와 함께 비슷한 연령대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벤을 과연 이들과 같은 세대를 공유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때, 과연 그러한가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벤은 자신이 기억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젊은 나이에 포르쉐를 타며,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래마을의 좋은 집에 산다. 벤은 종수도 해미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들을 흥미로운 대상으로 여길뿐이다. 


   개인적으로 벤은 해미, 종수와 같은 세대로서 세대가 겪고 있는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벤은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에서 ‘DNA가 좋잖아’라는 말을 한다. 이는 벤과 그 가족이 그들의 성공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자면 벤의 고민은 그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생존의 문제와 연결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전 세대인 벤의 부모가 현재의 벤을 구성한 것이며, 결국 벤은 이전 세대가 현세대에 남겨놓은 괴물인 것이다.

          

존재리틀 헝거(Little Hunger)와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     


   종수는 시종일관 무언가를 찾는다. 해미가 아프리카에 갔을 때는 해미의 고양이 ‘보일이’를 찾는다. 집에 계속 걸려오는 전화가 누구의 전화인지를 찾는다. 벤이 태우겠다고 한 비닐하우스를 찾는다. 해미가 우물에 빠진 어릴 적 이야기가 사실인지를 찾는다. 사라진 해미를 찾고 벤을 찾는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확실한 것은 해미가 사라졌다는 사실일 뿐, 그 무엇도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카메라는 종수를 먼지 낀 액자 밖에서, 가득한 안갯속에서 찍는다.     


   이 지점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해미가 극 중에서 말한 부시맨들의 춤을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해미는 부시맨들의 춤이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의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리틀 헝거는 그냥 배고픈 사람, 즉 생존의 욕구와 연결되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종수가 무엇인가를 찾는 행위는 ‘수수께끼 같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이다.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뜻이며 이는 곧 종수가 삶의 의미를 되찾는 방식이다.     

 

   종수의 이러한 모습은 종수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종수의 아버지는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월남전에 참전했고, 중동 건설 붐이 일어났을 때 산업 역군으로서 일한 사람이지만, 아버지의 친구이자 변호사의 말처럼 그의 삶은 타협이 없었다. 그 시절에 ‘강남에 아파트 하나만 사 뒀어도’, ‘피해자에게 무릎 꿇고 선처를 바라기만 했어도’ 아버지는 지금과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았을 사람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고향을 일으키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고,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피해자에게 사과할 생각조차 없다. 종수의 아버지는 리틀 헝거가 아닌 그레이트 헝거로 살았고, 그것이 좌절되어 역사 속에서 완전하게 파괴된 인물이다. (종수의 아버지를 현 MBC의 최승호 사장으로 선택한 것은 일견 정치적이면서 영리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최승호 사장 또한 ‘언론의 자유’라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해미는 리틀 헝거에서 그레이트 헝거로 넘어가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고 싶지만 현실의 어떤 족쇄가 그녀를 붙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 남산타워에 비쳐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그가 추구하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일종의 문신처럼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해미는 종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종수가 그레이트 헝거임을 알기 때문에 해미는 종수가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이 붕괴되는 순간 해미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벤은 어떤 사람일까. 벤에게는 결핍이 없다. 그는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는 해미를 보며 하품을 한다. 그의 친구들은 해미를 마치 애완동물처럼 바라본다.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어떤 기준으로 비닐하우스를 선택하냐는 종수의 질문에 벤은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 말한다. 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흥미와 재미이다. ‘뼛속부터 울리는 베이스’를 느끼는 것은 생존과 의미에 대한 결핍이 없기 때문에 가장 원초적인 욕망으로 돌아간 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파괴와 새로운 시작:불     

 

   영화의 결말에서야 <버닝>이라는 제목은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종수가 벤을 죽이는 순간 영화는 한국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어느새 고착화된 한국 내의 ‘계급’에 대한 문제를 파괴하는 모습으로 등치 된다.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어 벤의 차에 넣고 불태우는 종수의 모습은 이제 파괴와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며 그때 영화 내내 먼지 낀 종수의 차 앞 유리창의 와이퍼가 작동한다.  

    

   결말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이전 세대들은 모두 각자의 선택을 했다. 누군가는 벤의 부모님처럼 잘 살게 되었고, 누군가는 종수의 아버지처럼 가족을 영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이라는 고집을 버리지 못해 자식에게 가난을 대물림했다. 또 누군가는 해미의 가족처럼 생존이라는 문제에 집중하여 살아가고 있다.(생존이라는 문제에 집중한다는 의미는 해미의 언니가 ‘카드빚 갚을 때까지는 집에 돌아올 생각 하지 말라고 해’라는 대사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젊은 세대들 중 누구도 어느새 사회에서 굳어진 ‘계급’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재미로, 또는 진지하게 우리가 어떤 ‘수저’에 속하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나보다 높은 ‘수저’를 부러워하는 동시에 미워한다. 이는 곧 우리 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무기력함과도 연결된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벽을 깰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이 순간이 우리에게 과연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이창동 감독이 던지는 화두는 가치가 있다. 불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파괴와 새로운 생명. 그것이 우리 세대가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동 감독이 과연 젊은 세대를 잘 조망해냈는가에 대한 문제는 다르다. 영화에서 보이는 태도가 그렇다. 나는 이창동 감독이 노력은 했지만 우리 세대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수는 늘 흐릿한 창문을 통해 비치는 것이고, 안갯속에서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감독에게 청년들이 가진 알 수 없는 분노의 원인들 중 명확한 것은 계급의 벽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에 차의 와이퍼가 작동하는 것이 수많은 원인들 중 하나를 발견했다는 의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종수가 벤에게 ‘이제 모두 알았다’는 말을 한 뒤에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쓰는 장면은 감독이 일종의 회피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동안 행동하지 못하던 종수가 드디어 소설을 쓴다고 가정하면 그의 성장이 이루어진 것처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감독이 계급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겠다고 생각했다면, 마치 소설의 장면인 것처럼 구성하는 것이 좋은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성은 결국 문제의 파괴가 종수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해서 원인 그 자체를 파괴하지 못하고 벤이라는 원인에 의한 결과물을 살해하는 것 또한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는 원인에 대한 조명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안타까움을 남긴다.     


   물론 <버닝>은 좋은 영화다. 특히 정치, 종교,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게 금기시되어있다 싶은 한국에서는 이창동이라는 감독이 영화를 통해 던지는 화두 자체만으로도 담론을 이끌어 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답을 하게 될 것이다.      



몇 가지 의문   

  

1.   종수가 깨달았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벤이 해미를 죽였다는 것(장르영화)일까, 또는 해미가 종수의 집에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 뒤에 삶의 의미를 찾았기에 소멸해버렸음을 깨달은 것일까. 

    

2.   해미의 삶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혹시 사라지고 싶은 것이 삶의 의미는 아니었을까.    종수가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 그에게는 삶의 의미를 실행할 수 있는    명분이 된 것은 아닐까.  

    

3. 종수는 해미와 처음 관계를 가질 때, 남산 타워에 반사되어 들어오는 햇빛을 본다. 종수에게 사랑이란 어떤 의미인가. 젊은 세대에게 사랑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을 뿐, 삶의 의미로 작용하지는 못하는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로디즈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 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