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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자발적 재수

2025 BCMC에 다녀와서

by Loche


첫 대학입시 성적표가 나온 바로 다음 날부터 독서실로 가서 재수를 시작하였다. 점수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1년 재수하면 충분히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원 가능한 대학교는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곧이어 서울역에서 가까운 종로학원에 시험을 봐서 들어갔고 매일 집과 학원을 오가는 삶을 살았다. 전철을 타고 학원을 오가면서 공부했고 또 공부했다. 당시의 내 마음가짐은 절실했고 절박했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오직 입시공부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마침내 맘에 드는 성취를 이루었다.


어제 BCMC 컨퍼런스를 가면서 내 마음가짐이 그 당시 재수할 때의 심정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나는 보잘것없지만 1년 뒤, 5년 뒤의 나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 될 거라는 비장함이 서려있음을 건물의 유리창에서 비치는 내 눈빛에서 본다. 내가 꿈꾸는 나의 멋진 모습을 상상하며 그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블록체인 밋업 컨퍼런스(BCMC)는 매년 열렸지만 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부, 학계, 금융산업계, 연구소가 한자리에 모여서 블록체인분야 국내 현황과 미래에 대해서 논의하는 컨퍼런스다. 어설프게나마 아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모르는 용어 투성이었다. 98%는 못 알아듣는 수준.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전체적인 흐름과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일반인들은 피부로 가시적으로 전혀 못 느끼지만 범정부 차원에서 계속 준비하고 있고 테스트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국민들 대다수가 이런 급변하는 현실을 모른 채 살고 있지만 국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리였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이미 많은 늦었고, 사람들의 인식, 특히 사회 고위층과 정치인들의 인식 수준이 너무 낮아서 설득시키기 어렵다고 한다.


디지털 지갑도 테스트 중에 있고 스테이블코인도 테스트 중에 있다. 미국의 달러스테이블코인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데 국내 은행들의 대응은 너무도 느리고 근거 없는 여유로움과 자만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달러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대응 방안에 대해서 질문이 계속 올라오는데 여러 질문들 중에서 그 질문은 아예 무시해 버린다. 왜 솔직하지 못할까. 많이 부족함을 인정을 하고 위기 상황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애써 질문을 외면하는가. 오태민 작가가 걱정하듯이 달러 스테이블 코인이 국내 확산되면 국내 은행들 다 망할 거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어제 느꼈다.


며칠 전에 국내 금융과 증권회사들의 EPS와 PER을 비교해 보는데 N 투자증권과 H금융지주가 상대적으로 좋아 보였다. 그런데 어제 N 은행에서 20년 일하신 분이 발표를 하는데 윗사람들 이해시키기가 어렵다고 한다. N 은행의 거버넌스가 다른 은행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문제가 많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어제 그분의 강연을 들으니 N 은행과 N 투자증권에 투자하면 절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H금융지주는 그래도 국내금융주 중에서는 타격이 덜하지 않을까 싶다. 과거와 현재의 지표로만 판단하면 안 되고 기업을 이끄는 수장과 리더들의 마인드셋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N 은행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거긴 투자 대상에서 제외해야겠다.


어제 BCMC의 여러 현황 발표를 들으면서 신사업의 기회가 블록체인 분야에 참 많음을 보았고 디지털 세상이 성큼 가까워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던 좋은 자리였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것들이 탄생하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트렌드에 올라타서 기회를 잡으려면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에만 안주하면 안 되고 호기심을 갖고 새로운 것들을 계속 공부하고 시도해봐야 한다.


다시 재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때 재수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가 변변치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겸손함이 없었고 뚜렷한 삶의 방향을 안 가졌기 때문이다. 남들의 기준에 맞춰서 삶을 바라봤고 특별한 꿈이 없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2025년, 마침내 재수할 때만큼이나 강력한 동기부여가 다시 생겼다. 오늘의 나보다 나아지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가 가득하다. 그때처럼만 하면 나는 성공한다.


얼마 전의 양자컴퓨터 세미나에서도 그리고 어제 BCMC에서도 사회적 정년을 훌쩍 넘기신 분들께서 적지 않이 참석하셔서 앞 쪽에 앉아 경청하고 기록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면서, 공부에는 끝이 없고 성장에 대한 열망은 나이와 무관함을 그분들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분들에 비하면 나는 아직 새파랗게 젊다. 어떻게 하면 편하게 위험을 회피하면서 원초적 동물의 세계 안에서 안온하게 즐기며 살까 궁리하기보다는 꿈을 키우고 도전하고 실행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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