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

by Loche


"사랑을 알아보는 (내) 마음의 눈이 열릴 때"를 기다린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단 한 번도 진심에서 우러나서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던 그녀가 갑자기 (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을 알아봐 달라고 하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내가 보낸 편지 봉투를 사진 찍어서 프사에 올리고


내 편지에는 중요한 질문이 들어있었고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2 주가 지나도 답신이 없자 의혹이 빠르게 자라나기 시작했고 모진 글을 하나 올렸다 그랬더니 프사가 바로 바뀌었는데 그게 누구랑 같이 있을 때 찍은 게 아닌지 심히 의심이 되는 사진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안 기다리고 바로 차단을 하고 더 심한 글을 썼다 그랬더니 예전에 같이 찍은 추억의 여행지 파노라마 사진을 올리더라 '사랑을 알아보는 마음의 눈이 열릴 때" 문구는 그대로 둔 채로

그래 이번에는 좀 진정성이 있나 보다 한 번 기다려보자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탈퇴를 하더라 며칠 전부터 들여다본 그녀 카톡 프사에 올라온 나와 관련된 사진도 사라졌고


사랑을 알아보는 마음의 눈이 열릴 때까지 기다린다는 그녀의 선언이 (내가 그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몇 달을 시도 때도 없이 울면서 일 년을 기다린 거에 비하면) 불과 작심 일주일 여만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걸 보며, 그래 그게 원래의 네 본모습이지 싶다, 그때그때의 기분과 욕망에 충실한 인스턴트


내 글에 기분 많이 상했

내가 그동안 너로부터 받은 충격에 비하면 이건 만 분의 일도 안돼


그렇게 빨리 마음 바뀐 걸 보니 실망이야 차라리 그런 문구를 쓰지 않았더라면 그냥 그러려니 할 텐데


내가 올린 모진 글 두 편이 너의 밑바닥 본심을 테스트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번에도 또 혹하고 넘어갈 뻔했는 데 말이지


십 년은 갈 줄 알았던 멀티맨과 현재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나한테 다시 다가오려면 그의 흔적부터 깨끗하게 다 지우는 게 우선 아니겠어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랑 타령이니 카톡 프사는 여전히 그의 흔적이 남아 있고 하트 궤적하며 그찍어준 듯한 어둡고 칙칙한 사진도


그러니 내가 너의 사랑을 믿을 수 있겠냐고


나는 너를 기다릴 생각이었어

너의 글이 진심인지 알고 싶었지

네가 편지 보내기를 기다렸고 그러면 내 마음도 다시 온기를 찾을 것으로 기대했어


그런데 너는 며칠을 못 참고 탈퇴하고 지웠어

너의 사랑의 무게가 스타벅스 커피 쿠폰처럼 가볍 느껴진다


너를 향한 커다란 불씨가 아직은 살아 있지만

이젠 서서히 사그라들지도 모르겠다


그냥 너도 네 일에 몰입하며 살아

남자에 집착하지 말고

혼자서 잘 지낼 줄 알아야

나처럼


사진 보니 얼굴에 수심과 근심과 번민이 가득하더라

스스로 풀어나가야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어


성공해서 만나자고

나 없이도 밝고 명랑하고 여유 있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카톡 프사는 나에게 멀티 프로필 설정하지 말아 줘 가식으로밖에 안 보여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브런치 프사에 마지막으로 올렸던 우리 그림자 들어있는 위아래 사진을 아무나 다 볼 수 있는 일반 프로필에 올려


그리고 그럴리는 없겠지만 우리 행복해하던 얼굴 둘 다 같이 나오게 찍은 사진을 일반 프사 메인에 올린다면 기꺼이 바로 달려갈게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믿어도 될 테니


위 문장은 내가 바보임을 인증하는 글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