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호

by Loche


며칠 전 부산 출장을 다녀오면서 KTX 대신 무궁화호를 탔다. 숙박비는 실비 처리여서 남길 게 없지만 교통비는 KTX 요금 기준으로 선지급받고 자율적으로 교통편을 선택할 수 있다. KTX는 편도 36000원 정도인데 무궁화호는 17800원으로 반값이다. 대신 시간이 두 배로 걸린다. 굳이 급하게 다녀와야 될 이유가 없었고 비용을 최대한 절감하여 아낀 돈으로 투자할 생각으로 무궁화호를 선택하였다. 반면에 호텔 컨퍼런스룸에 늦어도 1시 전에는 도착해야 해서 아침 7시 10분 기차를 타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했다. 스키장 갈 때 새벽 4시 전에도 일어나곤 했으니 어렵지는 않았다.


가방은 가급적 가볍게 담으려고 하였다. 2일 차에는 하루 종일 걸어 다닐 계획이었으니까. 한편, 나는 어디에 있든 책이 옆에 없으면 정서적으로 불안해지는 유별난 심리가 있다. 여행 갈 때에도 그렇고. 재작년에 인도 여행을 갈 때 이북을 하나 가져갈까 아니면 만에 하나 액정을 깨 먹을 수도 있으니 두 개를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용감하게 하나만 가져갔는데 북인도 Leh에서 이북이 갑자기 먹통이 돼서 몹시 당황했고 급격히 외로움을 탔다. 어찌어찌하다가 하루 만에 다시 정상작동하는 걸 보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여자 친구는 없어도 문제없지만 책은 없으면 절대! 안된다. 그때의 경험을 교훈 삼아 다음에 다시 외국여행을 갈 때에는 무조건 이북 두 개를 가져갈 생각이다.


이번에도 가벼운 이북 리더기를 가져갈까 아니면 종이 책을 가져갈까 고민하다가 이북은 가벼운 대신에 잘못 눌리면 액정 파손의 위험이 있기도 하고 그보다는 박준 시인이 종종 그러하듯이 대출받아와서 하나도 안 읽고 3주가 지나서 반납처리하고 다시 재대출 받아온 '리스본행 야간열차' 책을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기차 여행이니 결도 잘 맞을 듯 싶었다.


나는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니는 편이다. 운동도 할 겸 한두 시간 거리는 그냥 걷거나 공공 자전거를 이용한다. 가는 날 아침에도 타슈를 타고 대전역까지 가볼까 하다가 기온이 낮아서 춥기도 하고 또 얼마나 걸릴지 자신할 수 없어서 그냥 버스를 탔다.


아주 오랜만에 타보는 무궁화호의 객실은 상대적으로 어둡고 낡고 청결함도 덜해 보였다. 예전에 KTX로 출장을 다닐 때는 책이나 의자 뒷면 포켓에 있는 KTX 매거진을 읽곤 했는데 무궁화호는 실내조명이 많이 어두워서 책을 읽을 조도가 안 나왔다. 기껏 나름 무게 나가는 두꺼운 책을 가져왔지만 바로 단념하고 안대를 하고 말랑말랑 귀마개를 꼽고 통로 쪽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잠을 청했다. 사람도 거의 없기도 하였고.


중간중간에 정차하는 역도 많았고 내 옆 자리는 네 번인가 사람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늙수그레한 아저씨, 다음에는 아줌마, 대구에서는 사람도 많이 타서 빈자리가 거의 없었고 옆자리에는 30대 초반의 여자가 앉았다. 잠을 청하다가도 계속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고 해서 길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름 재밌었다. 잠시 바로 옆에 왔다가 떠나가는 형형색색의 컬러들. 눈을 감은 채로 그들의 전자기적인 아우라를 느껴보기도 하고 체취와 향기, 담배냄새, 일터의 냄새를 맡으며 각각의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상상해 본다. 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할까, 가족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을까..


무궁화호는 검표원이나 여자 승무원들의 복장과 미모 심지어는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발산하는 화장품 향기도 KTX 승무원분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급여도 차이가 있으려나.


대전에서 출발할 당시에는 아주 조용했는데 동대구에서 청춘 남녀들이 대거 타면서 기차가 마치 옛날 대성리에 단체로 놀러 가는 대학생들처럼 왁자지껄하고 사방으로 미소와 호감있는 눈빛들을 주고받는 분위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얼마 안 지나서 객차 내 스피커에서 조용히 해달라는 멘트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도 KTX에서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으로 나는 오히려 재밌기만 했다. 그런 분위기는 이튿날 대전으로 돌아오는 저녁 기차에서도 비슷했 조용히 해달라는 스피커 멘트도 미소 지으며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대구 젊은 이들의 분위기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주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외국을 다니다 보면 라틴계 국가 사람들이 주로 타는 비행기나 버스를 탔을 때도 시끌시끌 화기애애 재밌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대구 청춘남녀들도 라틴계 못지않게 생동적이었다. 각 도시마다 사람들이 나름대로 제각각 특색이 있긴 하다.


오랜만에 간 부산에서 해보고 싶은 거 다 하고 저녁 8시에 출발해서 23시 34분에 도착 예정인 무궁화호를 탔는데 대전역에 도착하니 23시 45분이었다. 기차 시간은 믿으면 안되는구나. 그 시간에 버스는 다 끊겼고 지하철이 혹시나 막차가 있나 에스컬레이터로 한참을 내려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역무원들이 그 방향 지하철 막차가 11시 46분에 이미 떠나고 없다고 큰소리로 안내하고 있었다. 흠... 괜찮아 나에게는 튼튼한 다리가 있으니까. 택시? 노노~ 말도 안 되지. 타슈는 대여가능 시간이 0시가 마지막인데 이미 지났다. 유료 대여 전기 자전거나 킥보드는 관심 밖이다.


카카오맵으로 집까지 경로 검색해 보니 9.6킬로미터이다. 예상 도보소요 시간은 2시간 40분이라고 뜨지만 내 평균 걸음속도는 4.8km/h. 이렇게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을 안 한 건 아니다. 다만 대전역 주변이 어둡고 음침하고 밤길에 사람이 거의 안 보인다는 것이 좀 그랬지만 파리나 그르노블의 밤거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 지역보다는 비교도 안되게 훨씬 안전하다. 혹시 골목에서 누가 튀어나와도 줄행랑은 자신 있기도 하다.


어둠이 짙게 깔려 끝이 안보이는 길을 묵묵히 걸 마치 파타고니아 엘찰텐에서 피츠로이로 향하는 기나긴 직선 도로처럼 느껴졌다. 페이스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일정한 속도로, 그리고 언제든 급발진할 수 있는 마음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면서 가다 보니 저 멀리 도시의 상징이 보인다. 계속 걷는데 어깨와 등에서 살 빠지는 시원한 느낌도 나는 걸 보니 오늘 참 많이 걸었구나.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 결국 해냈군. 좀 무리이긴 했지만 이날 범어사 산행도 하고 온종일 많이 걸어서 뿌듯했다.


무궁화호는 KTX와 달리 의외로 재미난 면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 여행이었다. 다음에도 무궁화호를 타야지. 그런데 새마을호는 이제 없나? 통일호도 없겠지? 그 완행열차의 덜컹덜컹 느낌이 그립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