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근무하는 직장에서는 직원들에게 기업심리상담 EAP(Employee Assistance Program)를 연 3회 무료로 제공한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있었던 것인데 관심이 없었다가 올해부터 심리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심리 상담도 한번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초여름에 한번, 가을에 한번 그리고 오늘 마지막 3회 차를 받았고, 지인 찬스를 활용한 여름 때 개인 심리상담까지 총 4회 상담을 받아본 이야기를 해를 넘기기 전에 회고하고 정리하는 차원에서 적어본다.
EAP를 연계해 주는 회사 홈페이지에서 검색해 본 가까운 지역 상담센터는 구별로 적어도 스무 개씩은 되고 광역시 전체로 보면 백여 개는 충분히 넘어 보였다. 이렇게 많은 상담센터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 정신과 의원과 상담센터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몰랐었는데 의원과 병원은 처방 위주인 것 같고, 상담센터는 말 그대로 상담 위주인 듯하다.
네 번의 상담에서 전부 여자 상담사들이었다. 한 사람은 원래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고(알던 사람과의 상담은 비추이긴 하다), 나머지 셋은 성별을 모르고 신청했는데 만나고 보니 전부 여자였고, 실제로 상담 업계에서 남자는 매우 드문 것 같았다.
상담사와 내담자의 관계는 아주 특별하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지극히 사적이고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기에 세상 그 어느 사람보다도 친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만, 상담이 종료되거나 내담자의 상담 필요가 사라지면 언제 알았냐는 듯 연락이 끊기고 다신 만날 일 없는 남남이 된다. 이런 이별의 아픔을 감내해야 되는 것이 상담사의 숙명이기도 하다. 때로는 드물게 상담자와 내담자의 제한적 관계를 넘어서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안 되는 거는 없으니 누가 뭐라고 손가락질하고 업계에서 따돌림당한다고 해도 둘이서 너무 좋다면 뭔 일인 듯 실행에 옮기지 못할까. 내 이야기는 아님.
초여름 첫 상담사
도덕과 윤리 의식이 투철한 분이었다. 종교관도 뚜렷하고 일반적인 사회 규범의 틀이 분명하신 분.
그 틀에서 많이 벗어나는 사례를 이야기하니 눈이 똥그랗게 커지면서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길래, 아니 그 정도에 놀라시면 어떻게 상담을 이어나가실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반문하였다. 그 순간 이 상담사는 나를 상대하기에는 역량과 자질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적당히 남은 상담시간을 무의미한 대화로 때우고 나왔다. 참 눈치도 없게 다음 상담 예약일을 언제로 잡을까 물어보길래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하고 나왔다. 이처럼 후속 상담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종료되는 것을 업계 용어로 드랍(drop)이라고 한다. 대실망이었던 첫 상담이었다.
여름 두 번째 지인 상담사
이 분 직업이 상담사인 것은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관심 없었다가 연락을 해서 상담을 받고 싶다고 하니 바로 거절하셨다. 전혀 모르는 사람 이어야지만 안전한 상담이 되는데 이미 아는 관계이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고. 당연히 그렇게 나올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거기서 단념할 생각이 없었기에 바로 옆문을 두드렸다. 개인 상담이 아닌 상담 업계에 대한 현황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상담 심리 분야 스타트업 설립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차원이라고 하니 그제야 비로소 알겠다고 하면서 약속을 잡아주셨다. 성공! 이 분과 상담을 하기에 앞서서 오며 가며 가끔 마주치곤 했었는데 나를 보는 시선이 무언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곤 했었고 그게 어떤 것인지는 상담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동물적 감각인 본능에서 완전히 초연할 수 있을까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반팔 반바지의 맨살을 드러낸 시원하고 스포티한 차림으로 상담실을 찾았고 그분도 비교적 짧은 원피스에 다리를 겹쳐 앉아 마치 영화 '원초적 본능'의 주연이었던 샤론 스톤처럼 여성미를 은은하게 발산하고 있었다. 심플하면서도 편안한 상담실과 마주한 안락의자의 적절한 배치로 차분하고 쿨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EAP상담센터로 알아봤는데 여기는 조회가 되지 않았고 왜 그런지 물어보니 자기는 그런 규모도 안되고 EAP를 하기 위한 몇 가지 요건들이 있는데 굳이 그걸 하지 않아도 지금 정도의 작은 상담실 운영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고 한다. 더 크게 확장해서 상담 비즈니스를 할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경영보다는 상담사로서의 직업 만족도가 너무 높고 재미가 있어서 상담이 아닌 경영은 할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상담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그날은 어떤 즐거움이 있을까 기대가 되고 일을 벗어나서 휴식을 가지는 휴가는 안 간 지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휴가를 갈 필요를 전혀 못 느낀다고. 흠...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게 업계 이야기를 한동안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주제를 개인 이야기로 돌리면서 상담사 내담자 모드로 전환되었다. 그분이 애초에 우려했던 상황이 시작된 셈이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서로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미소 지으며 대담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아주 잘 통하였고 흥미진진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뭔가 묘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게 뭘까. 은밀한 이야기의 시작은 나였지만 지인 상담사가 갑자기 돌직구를 던진다.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다고 또렷한 말투로 말한다. 수줍음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순간 당황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당돌한 멘트에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데 내 온몸이 후끈하다. 나와 그녀와의 동물적 본능의 연결감이 매우 진하다. 활활.. 잠시의 정적... 그래서 그다음 말은..?
"오늘 상담이 마지막이에요 다음 상담은 없어요. 상담사 직업윤리에도 어긋나는 일이에요. 애초에 상담을 하면 안 되는 관계였어요"라고 말한다. 나는 한창 이야기가 재밌어지려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다음은 없다는 말을 들으니 무척 아쉬워서 "정말 다른 의도는 추호도 없다, 이야기가 너무 잘 통해서 다음부터는 상담료 제대로 내고 상담하고 싶다"라고 말했으나 한번 내린 그녀의 결정은 바뀌지가 않았다. 그녀는 단호했고 그다음은 없었다. 뇌리에 오래도록 남을 두 번째 상담이었다.
가을 세 번째 상담사
지인 상담사와의 강렬했던 에너지가 여름이 지나가면서 점차 힘을 잃어갔고 EAP 2/3회 차 상담을 어디서 받을까 조회를 하다가 어떤 상담센터 소개란에 '성장과정에서의 애착 유형'에 주안점을 두고 상담한다는 소개글이 있는 곳이 눈에 들어와서 그곳에 예약을 하고 찾아갔다.
심리상담업계의 스타트업 설립 차원에서 사전 질문 리스트를 작성해서 방문하였고 순차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상담센터가 별로 없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수요도 공급도 같이 늘어나고 있다고. 본인의 노동력으로 올릴 수 있는 수익은 한계가 있으니 무한 확장성을 가지는 스타트업 창업이나 동참은 생각 없냐고 물어보니 이 분도 2번째 지인 상담사처럼 자기는 상담 자체가 너무도 보람 있기 때문에 상담만 계속할 생각이라고 하고 동종 업계 사람들도 많이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대화를 나누면서 이 분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만족도가 상당히 높음을 알게 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방문해서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겨울. 2024년을 열흘 정도 남겨둔 토요일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EAP 상담
멀지 않은 곳의 상담센터를 예약해서 방문하였다. 들어가서 대면인사를 하는데 첫인상을 보니 내공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았다.But 상담사 경력 10년이고 상담 대학원 박사 과정도 마친 사람으로 기관과 대학에 주 1~2회 정도 나간다고 한다. 경력과는 무관하게 얻어갈 것이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예상대로 내담자의 말을 들어주기보다는 자기 말이 길어지는 스타일. 1회 상담시간 50분은 매우 짧다. 무슨 이야기 좀 하다 보면 훌쩍 시간 다 지나가는데좀 들어주렴. 당신 생각과 경험 들으려고 귀한 시간 내서 여기 온 게 아니라고. 내가 묻는 말에만대답해 주면 안 되겠니. 꼭 능력 안 되는 이들이 핵심을 못 건드리고 곁가지 말에 맴돈단 말이야.. 처음에는 내버려 두다가 나도 더 이상 못 참고 중간에 말 자르고 내 맘대로 화제를 바꿔나갔다. 대화가 재미가 없어..
규범과 윤리의 틀에 갇힌 상투적인 사고방식은 첫 번째 상담사와 다르지 않고. 말로는 자기 생각과 다르더라도 겉으로는 티를 안 내고 들어준다는데 그래봤자 가면 쓰는 것과 별 다를 것 없지 않겠어. 진심으로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아주 조금의 거부감도 없이 수용할 수 있는 내적 성숙 없이 그냥 들어만 주는 것은 진짜 공감을 이끌어낼 수가 없어요 선생님... 이쪽 업계도 파레토의 법칙이 적용되는 거는 예외가 없나 보다.
대화 상대가 안 되는 이와 딱히 할 이야기가 없어서 책 읽기가 성장에 큰 도움이 되더라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틈날 때마다 책을 보는 편이라고 말을 하니 그러면은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보냐고 물어본다. 속으로 어이가 없어서 "밥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하루 종일 열몇 시간씩 책 보는 날도 많아요"라고 답했더니 놀란다. 많이 보는 게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얼마나 책을 안 읽는 사람일까 싶다. 자기보다 뛰어난 슈퍼바이저와의 정기적인 상담도 상담실력 향상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꾸준하게 많은 독서를 통한 내면의 성장이야말로 훌륭한 상담사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임을 이 상담사를 보면서 알게 된다.
네 번 중에 두 번은 성공적이었고 두 번은 꽝. 그래도 반타작이 어디야. 내년에도 또한 EAP 무료 상담을 다 받아볼 생각이고 상담료를 제대로 내고서라도 슈퍼바이저 급의 높은 자질의 상담사분들도만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건 상담업계 내부 정보를 통해야지만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냥 인터넷 검색으로는 못 찾는다고.
내 분야 사람이 아닌 타 분야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시야를 얻을 수 있다. 내년에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볼 생각이다.
심리 상담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께는 아래 책을 추천합니다. 만화 형식으로 되어 있어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상담심리 전문가들도 보고 또 보는 책입니다.
또한 아래와 같이 심리상담 정부 지원 사업이 있어서 저렴한 가격으로 심리 상담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신청 기간은 올해 말까지. 저도 얼른 신청해서 혜택을 누려 봐야겠습니다.
이거 말고도 또 다른 정부 지원 사업이 있다는 것을 아래와 같이 알게 된다 역시 정부 지원 사업은 찾아먹는 사람이 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