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십 년 연상인 직장 이성 선배님이 있다. 오래전에 다른 몇 사람들과 같이 해외 출장을 갔을 때, 저녁 식사 자리에서 와인에 취해 누나라고 불렀을 정도로 마음 편한 분이고 내가 탱고를 춘다는 것을 처음으로 말했던 분이기도 하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는 업무적인 관계이다 보니 업무 외적인 이야기를 터놓고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손으로 꼽는다.
몇 해 전 그 선배님 사무실에서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본인은 더 이상 해외여행은 안 간다는 말을 나에게 하였다. 그때는 속으로 갸우뚱했다. 출장과 휴가를 통해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신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 어떤 계기로 그만 다녀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을까. 나의 궁금해 하는 표정에 그분은 아무 말 없이 스스로 답을 찾으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때만 해도 나는 틈만 나면 여행을 다니고 싶어 했고 여행을 통해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했고 은퇴하면 한국에 있는 시간보다 해외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노벨상 선정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커피를 끊고 좋아했던 여행도 거의 안 간다는 말을 하였을 때 공감이 안되었는데, 최근 보름 전부터 일체의 중독을 끊는 차원에서 커피를 그만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어제는 불현듯 나도 이제는 직장 선배와 한강 작가처럼 여행을 거의 안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한강 작가와 두 사안에 대한 인식의 전환 타이밍이 비슷하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를 돌이켜 보면 지난 십여 년간 세계의 곳곳을 여행하였고 안 가본 궁금했던 나라들은 대부분 둘러보았다. 지금 와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도 이미 세 번째 방문이고 이 정도 다녀봤으면 더 안 다녀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여행하였다는 생각이다. 얼마나 좋을까 환상을 가졌던 나라들도 다 가봤다.
이제부터는 해외여행보다는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책을 더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최근 2년 사이의 나의 변화와 성장은 책의 영향이 매우 크다. 여행 중에도 무거운 종이책이 아닌 가벼운 이북을 갖고 다니면서 '밀리의 서재'에서 고르고 저장한 책들을 틈날 때마다 읽었다.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허전하고 며칠 책을 못 보면 정체되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 드는 생각은 여행에서 만나는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훌륭한 책에서 만나는 위대한 작가들의 이야기가 나의 내면의 성장에 훨씬 큰 도움이 됨을 여행을 하면 할수록 알게 된다. 내가 여행을 하는 주된 이유는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인데 최근의 여행을 통한 성장의 체감속도가 예전보다 많이 둔화되고 포화 상태에 도달한 느낌이다. 돌아다니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서 얻는 게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오죽하면 이번 여행의 마지막 도시이자 올해의 마지막 여행지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밀롱가도 거의 안 가고 에어비앤비 숙소에 틀어박혀서 며칠째 책 보고 계속 생각하고 글쓰기를 하고 있다. 밖에 나가봐도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고 안 가본 밀롱가 가도 얼마나 다르겠어라는 생각이다.
밀롱가도 여기저기 가볼만큼 가봤고 수업도 이미 많은 좋은 수업을 받았다. 끝도 없는 수업을 또 받기보다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개인 연습 없이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 귀국하면 개인 연습할 최고의 공간도, 연습을 도와줄 훌륭한 파트너도 있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독서와 글쓰기, 연습과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
내일 출국하기에 앞서서 여행 총정리 글을 써보자고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내가 왜 안 돌아다니고 책만 보고 있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고 불분명했던 핵심적인 이유가 짙은 안개가 걷히듯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신기하다 이게 글쓰기의 장점인 것 같다. 글을 쓸 때마다 매번 느끼는 바이고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를 계속 해야 되는 거 같다.
한 해 한 해 나이는 먹어가지만 노화의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내면의 성장의 속도는 더욱더 가속됨을 느낀다. 그래서 삶이 재밌어진다.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어 주신 분들께 큰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나은 내가 되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The Cathedral Buenos Aires Argentina
아래 탱고 공연들은 일반적인 밀롱가에서 춤출 때의 탱고가 아니라 관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연을 위한 아크로바틱 쇼 탱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