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단편 <눈길>을 읽고
깜깜한 겨울의 새벽. 눈이 소복이 쌓인 산길. 뽀드득뽀드득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가 처연하게 울린다. 어스름한 별빛에 기대어 눈길을 걸어가는 엄마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그만 들어가시라고 하고 어머니는 조금만 더 가겠다고 한다. 말은 그게 전부다. 그들은 침묵으로 각자의 슬픔과 절망을 감당하고 있다. 침묵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고 있지만 각자는 서로 다른 문장들로 이 침묵을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고 마지막 남은 집 한 채 까지도 남의 손에 넘어가버렸다. 어머니는 타향에서 공부하는 어린 아들에게 이제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아들이 집안의 몰락을 전해 듣고 집에 온 그날, 남의 손에 넘어간 그 집에서 밥을 한 끼 지어 먹였다. 그리고 남들이 보지 않는 새벽에 도망치듯 눈길을 걸어 아들을 떠나보낸 것이다. 열일곱 소년은 그렇게 어머니의 세계에서 쫓겨나버렸다.
누구나 부모의 세계와 이별을 해야 하는 때가 온다. 그리고 반드시 ‘이별해야 한다.’ 단지 집을 떠나 혼자 살아가는 이별이 아니라 경제적 독립을 시작으로 정서적 독립에까지 이르는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져야 주체적인 존재로서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해진 나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어쩔 수 없이’ 혹은 ‘어쩌다 보니’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어른이 되어있는 자신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다만 분리의 과정이 자연스럽다면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자신의 세계를 가꾸어갈 때 적어도 분노나 원망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열일곱에 집을 떠나야 했던 그는 원치 않게 어른이 되었다.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새끼 호랑이를 절벽으로 밀어버리는 것만큼이나 억울하고 냉혹한 홀로서기가 타의에 의해 시작되어버렸다. 헤아려본다. 얼마나 원망이 가득했을까. 원망을 해소할 대상도 없이 어른이 되어버렸으니 간신히 연락은 끊기지 않은 어머니라도 그들의 사이는 남만 못하다. 마음속 응어리와 울분이 시간에 용해되었더라면 덜 힘들었을 텐데 오히려 시간의 힘을 업고 단단히 가슴속에 박혀버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못난 태도를 자꾸 변명한다. 자신은 어머니에게 진 빚이 없다고. 어머니로부터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으니 아들로서 해야 할 도리도 없는 거라고. 그는 눈길에 떠나왔던 그 새벽, 어머니가 어떤 걸음으로 돌아가셨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떠난 아들의 발자국을 되밟아 돌아오며 눈물 떨구었던 어머니를, 마을 가득 푸진 햇살에 시린 눈이 부끄러워 한참을 마을로 돌아가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을 알려하지 않았다.
엄마의 시린 눈을 본 적이 있다. 대학 4학년 마지막 시험이 끝난 날. 서울에 가겠노라고 선포했다. 서울 살이 하러 떠나는 딸에게 월세방 하나 얻어 줄 형편이 못되었던 엄마는 안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그러라고 하셨다. 당장 입을 옷가지만 챙겨서 떠나기로 하고 버스표를 끊었다. 떠나기 하루 전날, 엄마가 시장에 가자셨다. 독감 예방 주사도 맞고 내복도 한 벌 사야겠다고 하시면서. 그게 가난한 우리 엄마가 타향살이하러 가는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내 손목을 잡고 병원을 가고 내복 집을 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너무 ‘엄마‘ 같아서 진짜 ’좋은 엄마‘ 같아서 코끝이 찡해졌던 날이었다.
언제 어른이 된 걸까 생각해봤을 때 떠오르 장면이다. 그 겨울,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서울 드림을 품고 떠나왔던 그때. 빈손으로 엄마 품을 떠났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서럽지 않았다.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지만 엄마가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의 세계’로 떠나는 딸을 따뜻하게 배웅해 주었고 나는 ‘엄마의 세계’에 뜨겁게 포옹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엄마와 눈길을 걸었던 열일곱의 그 소년이 품고 있던 가슴속 응어리가 눈물로 녹아내렸다. 어머니와 함께 걸었던 눈길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을, 어머니 홀로 돌아갔던 눈길도 있었다는 것을 아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금 늦었지만 그 소년은 이제 진짜 어른이 될 것이다. 홀가분하고 따뜻하게 자신의 세계를 가꾸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