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요즘 조금 달라졌지? 글쓰기 숙제도 시간 넉넉하게 남기고 끝내기도 하고, 아침 책 읽기 숙제도 웬만하면 저녁까지 넘기지 않고 출근 전까지 마무리하고 말이야. 언제까지 갈지 장담할 순 없지만 일단 요즘은 ‘아침 청소’ 리추얼 덕을 좀 보고 있어. 역시 나는 몸을 움직이면서 정신을 깨우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 좀 더 발전시켜서 스트레칭이나 가벼운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삶이 단조로워지니까 정말 필요한 것들에 시간을 할애하게 돼. 어릴 때는 이것저것 타인과 관계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쓰잖아. 그게 또 즐거웠고. 나이가 이즈음 되니까 관계가 단순해지기도 하고, 사람 만나는 일을 애써 만들지도 않게 되네. 너무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친구들이나 지인들도 거의 만나지 않아서 이러다 외톨이 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 외톨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볼 때도 있는데 그건 오만이야. 어떻게 친구 없이 행복한 삶을 상상할 수 있겠어? 지금까지 친구들과 함께여서 행복했던 시간들을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말이야.
우리 동네에 L이 있어 참 다행이다. '커피 한 잔 할래?'라던가 ‘마라탕 먹고 싶어.'라고 문자를 보내면 안 된다고 하는 법이 없거든. 가까우니까 미리 약속을 잡지 않아도 한두 시간 뒤에는 만날 수 있는데 그게 참 장점이야. 나는 예약을 하거나 계획을 짜는 걸 안 좋아해서 미리 정해진 약속은 아무리 즐거운 약속이라도 막상 시간이 다가오면 집 밖을 나가기가 싫어질 때가 있거든. 즉흥적으로 만나는 쪽이 더 좋아. 기분 내키는 때에 연락해서 그 기분이 사그라들기 전에 만나는 스타일이 나랑 잘 맞아. 그러니 집 가까운 친구가 나한테는 딱인 거지. L 덕분에 외톨이는 간신히 면하고 있어. 얼마 전에 L이 아메리카노 한 잔 값에 튤립 한 다발을 살 수 있는 꽃집을 발견해서 만나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어. 꽃집 위치가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여서 일요일 한낮에 운동 겸 해서 다녀왔어. 아쉽게도 그날은 튤립이 없어서 데이지 꽃을 조금 사 왔는데 화병에 꽂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니 거참 신기하게 방이 환해지더라. 꽃병이 차지하는 자리는 고작해야 손바닥 크기만큼이잖아. 그 작은 자리에 앉아서 어쩌면 그렇게 15㎡ 공간을 빈틈없이 밝힐 수 있는 것인지 존재감이 어마어마하네. 매화 피기 전에 봄을 좀 당겨서 누렸다. 데이지가 시들면 다시 튤립을 사러 가 보려고. 당분간은 그 꽃집을 참새 방앗간 찾아들 듯할 것 같아. 운동도 되고 싼 값에 꽃도 사서 일주일을 행복할 수 있으니 그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울 것 같아.
<시와 산책>이 참 좋았다고 했지? 나는 그 책과 작년 여름휴가를 함께 했었다. 인스타 피드에 에베레스트산을 닮은 팥빙수 사진과 함께 여름에 읽어도 서늘한 겨울 기분이 느껴지는 책이라는 코멘트를 붙여서 올렸었고. ‘11월을 편애한다.’라는 표현이 좋다고도 했던 것 같고. 여름에 절반을 읽고 이후에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읽고 있었는데 네 편지 덕분에 나머지를 단숨에 읽어버렸어. 작년에 읽었던 에세이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 같아. 그런데 독자로서 보다는 에세이스트 지망생으로서 좋았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게 참 어려운데 내 마음을 정확히 몰라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말을 조합하는 능력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 <시와 산책>의 문장들은 단어들이 개성 있게 조합되어 있는데 그게 튀지 않고 자연스러우면서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하더라. 작가님만의 고유한 표현들 덕분에 마음이 더 진솔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마음을 흔드는 문장은 기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지만 근처까지라도 가보고 싶은 마음에 뭔가 시작한 게 한 가지 있어. 사실 이 구상은 테드 창의 <이해>를 읽고 싹이 튼 거야. 그때 언어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이 오래 머무르더라고. 초월적 인간이 되어버린 소설 속 주인공도 자신이 깨달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한계를 느끼잖아. 나도 내가 가진 언어의 가짓수만큼의 사고만 하고 사는데 그걸 넘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더라고. 어릴 때 땅따먹기 놀이를 할 때 놀이터 안에 내 땅의 경계를 조금씩 늘려가잖아. 그런데 놀이터 밖으로 나갈 생각은 못 했었는데 딱 그 기분인 거야. 아무도 나가지 말라고 한 적이 없는데 스스로가 한계를 정하고 바깥으로 나가볼 생각을 거세해버렸구나 싶었어. 이제 이 경계를 넘어가는 연습을 좀 해볼까 해. 너의 하루 한 문장 만들기에 상응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문장을 만드는 건데 너처럼 키워드나 소재를 상정하고 문장을 만드는 건 아니고 ‘말 안 되는 문장 만들기‘를 해보기로 했어. 절대로 말이 안 되어야 해. 예를 들면 ‘핑크색 발가락이 콧구멍을 긁고 지나간다.’ ‘봄바람이 내 속눈썹 끝에 앉아 그네를 탄다.’ 같은 문장을 만들어보는 거야. 재밌는 게 말 되는 문장을 만드는 게 너무 익숙한 나머지 말 안 되는 문장을 떠올리는 게 잘 안돼. 궁리 끝에 말 안 되는 문장이랍시고 써놓은 걸 보면 결국은 어떤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느껴지더라고. 너무 오랫동안 말 되는 말에 익숙하게 살았어. 이 놀이가 그동안 쓰지 않은 뇌의 한 부분을 조금 건드려 주길 바라고 세상이 손톱만큼이라도 좀 더 재밌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 물론 글쓰기에도 어떤 식으로든지 도움이 되길 바라니까 당분간 매일 해볼 계획이야.
다시 <시와 산책>으로 돌아와서, ‘깊이 있는 사유를 품은 시처럼 은유적이고 간결한 산문집’을 쓴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고 했잖아. 나도 이 작가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가 궁금해진 책이 있었어. <시와 산책>처럼 작년에 입소문이 많이 났던 책이라 관심만 가지고 있었는데 네가 친히 거듭 추천을 해서 냉큼 사서 읽었지. <긴긴밤>을 읽고 나서 도대체 루리 작가님은 어떤 사람일까 참 궁금해지더라고.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토록 아름답고 단단한 이야기를 어려운 낱말 하나 없이 하나도 멋 부리지 않고 이렇게 멋지게 쓰셨을까 너무 궁금했어. 게다가 그토록 아름다운 그림들도 직접 그렸다니 경탄을 금치 못했다. 최근 몇 년간 읽었던 책들 중에 가장 좋았어. 얼핏 인간의 탐욕에 희생되는 동물들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겠구나 예상하면서 슬픔을 준비하면 오산이잖아. 그건 아주 일부일 뿐이야. 노든이라는 코뿔소가 세상에 나가서 아픔을 겪은 후에 어린 펭귄과 함께 바다를 찾아 걷고 걷고 또 걷는 그 과정이 그대로 삶이었어. 마지막 장을 덮을 땐 방바닥에 눈물 콧물 닦은 휴지가 그야말로 바다를 이루었다. 노든과 어린 펭귄을 여우와 어린 왕자만큼 사랑하게 됐어. 이야기 중간중간 들어있는 그림들은 또 어떻게. 그림 한 장면에 마음이 무너지기도 하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기도 하고 다행이다 안도하기도 하잖아. 루리 작가님의 그림이 주는 힘이 정말 대단하더라. 한 장 한 장 소중한 그림들 중에서 나는 마지막 그림, 펭귄이 뒤돌아보는 그림이 가장 좋았다는 말로 <긴긴밤> 이야기는 끝낼게. 아, 한 가지만 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 오버랩되더라. 노든에게서 로자 아줌마를, 어린 펭귄에게선 모모를 떠올렸다면 너무 억지스러우려나. 노든과 로자는 어린 펭귄과 모모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살 수 있었을까. 사랑은 살게 한다고, 존재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두 작품이 교차되었어. <자기 앞의 생>의 ‘사랑해야 한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긴긴밤> 덕분에.
2월의 외도는 잘 정리되었어? 너에게 좋은 분들이 많이 생긴 것 같아서 그분들에게 너를 잠깐 양보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실컷 놀고, 많이 성장하고 결국은 잊지 않고 돌아와 준다면야 외도가 길어져도 기다릴 수 있지. 다만 네가 내준 숙제 하느라 낑낑 대며 기다렸다는 거. 근데 숙제의 의미가 애매해. 봐봐. ‘좋아하는 단어 세 개 선물하기’가 숙제였잖아. 그래서 단어를 고르다 보니 이게 묘해. 단어를 좋아하는 건가, 그 대상을 좋아하는 건가 하고 말이야. 그래도 나는 복잡하게 생각해서 꼬치꼬치 묻고 싶진 않더라. 내 맘대로 생각해버렸어. 그래서 책상, 묘비, 연애 이렇게 세 가지를 너에게 선물하겠어. 보잘것없는 씨앗을 어떻게 키워낼지 기다려봐도 될까?
2022년 2월 28일 노든이면서 어린 펭귄이기도 한 은성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