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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성 Jan 31. 2022

1월의 안부 기다리고 있을 승희에게

승희야 안녕.      

1월의 마지막 날이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아쉬운 마음에 음력으로는 아직 새해가 시작도 되지 않았으니까 괜찮다고 위안 삼아볼까 하다가 그냥 아쉬워하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어. 1월이 얼른 자리를 비켜 줘야 봄이 그만큼 다가올 수 있을 테니까. 느꼈는지 모르겠는데 해가 길어졌더라. 오후 다섯 시쯤 문득 창밖을 보는데 웬걸 아직 빛이 제법 남아있는 거야. 낮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봄이 지금 열심히 가고 있다고 티를 내는 것 같아서 반갑더라고. 기온은 여전히 낮고 바람은 아직도 차갑지만 햇볕의 색감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건 기다림에서 오는 착각일까 섬세한 차이를 감지하는 예민함일까.      


황현산 선생님은 <밤이 선생이다>의 ‘춘천의 봄’에서 남쪽의 봄은 춘천의 봄에 비하면 간절한 기다림이 덜하다고 말씀하시잖아.     


천지가 너무 성급한 남녘의 봄은 그렇다....남녘의 봄은 찾아올 때 이미 난숙하다....그것은 어디선가 갑자기 몰려왔다 물러가버리는 봄이다. 제주보다 더 먼 남쪽 먼 곳에서 실려온 박래품의 봄이다. 자연은 그것을 만들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진정으로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이 대목에서 여전히 항변을 해보고 싶어 진다. ‘아니랍니다. 겨울의 추위가 덜하다 하여 봄을 기다리는 마음까지 덜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말이야. 춘천에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꼭 내 마음 같다고 외치고도 싶고.      


춘천의 겨울은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봄옷을 입는 날은 짧아도 봄은 마디다. 그것을 기다리고 음미할 충분한 시간이 있다. 진해의 벚꽃이 이미 파장이라는 4월 어느 날, 기차를 타고 가평을 지나 강을 넘어 들어오면 구석구석 개나리가 줄줄이 피어 있다. 그 물빛이라니! 눈부시고 찬란하나 한 오라기의 방자함도 없는 고전주의의 봄이 거기 있다. 그것은 전염병이 아니며 유행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서 불려 왔거나 누가 가져다준 봄이 아니며, 춘천이 그토록 모질게 만들어낸 봄이다. 그래서 그 겨울처럼 단단하며, 그 눈처럼 깨끗하다.

     

‘금강석처럼 단단한 춘천의 겨울’은 손사래 치며 마다하고 싶지만 춘천의 ‘한 오라기의 방자함도 없는 고전주의의 봄’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뺏어오고 싶어 진다.      


너는 벌써 너의 봄을 불러들였던데. 새해 시작과 함께 거침없이 활동 영역을 넓히고 다양한 사람들과 왕래를 시작했잖아. 우린 여전히 젊다,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고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좋아 보이더라. 그 많은 것들을 모두 잘 해내고 있는 너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어. 요즘 나는 너와 정확히 반대의 추구에 빠져있거든. 너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들을 펼치는 데서 재미를 찾고 있다면 나는 나에게 더 집중하고 싶어진달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더 철저히 혼자의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1월부터 시작한 글쓰기 주제와 좀 더 끈질긴 씨름을 해보려고 애를 쓰고 있어. 12월 한 달 동안 글쓰기를 쉬어서 그런지 글쓰기에 몰입하는 능력치가 줄었더라. 글의 전체 흐름에 맞게 문단을 구성하는 게 잘 안 풀려서 애를 좀 먹었다. 또 <아무튼 독립>이라는 제목 아래 세 번째 글까지 진행이 됐는데 이 세 편의 글이 모두 스타일이 제각각이라 통일성이 느껴지지 않더라고.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어떤 독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치밀한 계획이 부족했던 결과구나 싶어. 원인은 찾았는데 해결방안을 찾기가 어려워서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데 좀처럼 유레카를 외칠 희망이 안 보이네. 그래서 글의 전체 분위기는 어떻게 정할지, 어조는 어떤 식으로 통일감을 줄지, 시각의 일관성은 어떻게 유지시켜 갈지 궁리하는 게 요즘 내 취미 생활이야. 그런데 참 신기하게 그런 생각들에 꽂혀 있는데 릴케의 편지를 엮은 책이 내게로 왔다.

     

당신은 당신이 쓴 시들이 좋은 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이번에는 나한테 묻고 있습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것을 물었겠지요. ···· 당신은 당신의 눈길을 외부로만 향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그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충고하고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겐 단 한 가지 길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 이것을 무엇보다 당신이 맞이하는 밤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가?” ···· 당신이 “나는 써야만 해”라는 강력하고도 짤막한 말로 답할 수 있으면, 당신의 삶을 필연성에 의거하여 만들어 가십시오. 당신의 삶은 당신의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 이 같은 열망에 대한 표시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中>


‘정말 무심하고 하찮은 시간까지도’라는 구절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 자신이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경지까지 노력을 해야 하는지 상기시켜줬어. 사실 자기가 제일 잘 알잖아. 정말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는 말이야. 남한테 물어볼 것도 없지. 더 많이 고민하고 열심히 써가면서 내가 만족하는 답을 스스로 찾도록 해야지. 앞으로 고민은 계속되겠지. 다행인 건 나는 이런 궁리들을 즐거워하고 있어. 심심풀이로 손에 쥔 큐브를 맞추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 다른 생각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이 여섯 개 면의 색깔을 맞추는 것에만 생각을 집중하잖아. 물론 완성을 목표로 큐브를 쉴 새 없이 조작하고 있지만 사실 그런 과정이 놀이인 거지. 내 글쓰기에 대한 궁리 역시 보다 완성된 글을 위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지만 이미 그 자체로도 즐거워. 그리고 요즘은 자주 그런 생각이 드는데 내 평생의 놀이를 정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무엇에 대해 고민하며 살 것인가가 정해진 것 같아서 행복한 거 있지. 고민은 편안함의 반대편에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자기 주도적으로 선택한 고민은 행복과 같은 편에 서 있을 수 있더라.     


지난 편지에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해 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단편집을 샀다. 그중에서 특별 추천을 받은 <이해>를 읽어봤어. 도입부가 되게 흥미진진해서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신나더라. <매트릭스>나 <소스코드> 같은 영화가 떠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천재를 넘어서는 초인의 사고 체계는 어떤 것일지 상상하는 재미가 상당했어. 책을 읽고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해 봤다. 그렇게 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흔한 만화책 읽듯이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을 재밌게 읽으려면 역사, 미술, 음악, 철학 등에 대한 배경 지식이 두둑해야 하잖아. 더도 덜도 말고 딱 프루스트가 알고 있는 만큼만 재빨리 습득해서 그의 책을 지금보다 열 배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더라고. 그런데 정작 ‘이해해’라는 레이놀즈의 말은 해석하지 못했어. ‘타인을 이해하다’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몇 번을 읽어봐도 시원스런 해답은 못 찾겠더라. 고구마 열 개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괴로워서 숙성을 좀 시켜볼 마음에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 덮어서 밀어 넣어뒀다. 시간이 좀 지나면 내용이 좀 연해져서 입안에서 살살 녹여 먹을 수 있게 될까 하고.    

 

따뜻한 아랫목에 들어가서 테드 창의 소설과 함께 보내는 겨울도 괜찮겠다 그지? 어릴 때 온돌방 아랫목에 이불 덮고 누워서 tv만화도 보고 책도 읽고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불속에서 뭔가를 하지 않은지가 참 오래됐네. 어른이 되면 모두 그렇게 되는 건가? 뒹굴뒹굴 게으름의 재미에 빠져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겨울엔 좀 게을러도 되는데. 너는 게으르기가 어려울 테니 내가 너의 몫까지 게으름을 부려볼게 책임감 있게. 남은 겨울 건강하게 잘 보내자.


2022. 1.31. 새해의 첫 편지에 올해의 행복을 담아 은성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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