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목요일은 아파트 재활용 분리수거 날이다. 세 칸으로 나뉜 재활용 쓰레기 바구니를 베란다에 두고 비닐과 종이 그리고 기타 등등을 구분해서 모아 2주에 한 번 비운다. 유난히 택배 박스가 많이 모인 주에는 베란다가 택배 박스에 파묻힐 것 같아 2주를 버티지 못하고 비워내기도 한다. 직육면체의 상자들을 납작하게 정리하면서 정말 온라인 쇼핑으로 살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는지 회의가 든다. 작은 화장품 하나 샀을 뿐인데 알맹이를 싼 몇 겹의 포장을 뜯다 보면 그냥 집 앞 로드샵에 가서 적당한 걸로 하나 샀어야 했나 싶어 진다. 새것 같이 반듯한 상자나 포장 용기들은 버리기가 아까워 쓸 데가 있을까 하고 가지고 있어 보기도 했지만 결국엔 버리게 된다는 걸 경험으로 깨우친 후로는 미련 없이 쓰레기통으로 직행이다. 술은 마시지 않으니 빈 술병은 없고, 배달음식도 거의 시켜 먹지 않는 편이라 플라스틱 용기도 나오지 않는데 그럼에도 쓰레기 바구니는 꾸역꾸역 차오른다. 혼자 사는데 웬 쓰레기가 이리도 많이 나오는 걸까?
혼자 사는 집인데 쓰레기가 나와봐야 얼마나 나올까 싶은 마음에 3L들이 작은 쓰레기통 하나면 되겠다 싶었다. 쓰레기를 오래 모아두면 냄새도 나고 벌레도 생길 테니 쓰레기가 많이 모이기 전에 자주자주 비워버릴 요량이었다. 물론 이론적으로 옳고 바람직한 선택이었으나 쓰레기통 차는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고 비워야 하는 날이 너무 자주 돌아와서 당황스러웠다. 쓰레기통을 비울 때마다 꼭 자주 비워야만 하는 걸까, 좀 더 큰 쓰레기통으로 바꾸는 게 효율적이지 않을까라는 회의가 찾아온다. 주범은 바로 물티슈다. 가장 편리하게 잘 쓰는 물건이면서 쓸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요망한 물건. 밥을 먹고 식탁을 닦을 때 한 장 뽑아 쓴다. 방바닥에 끈적끈적한 것이 밟힐 때면 또 한 장 뽑는다. 책상에 먼지가 보일 때 한 장, 가스레인지에 기름이 튀었을 때도 한 장 뽑는다. 필요할 때면 언제나 가장 쓰기 편한 상태로 준비되어 있음에 반했다. 쓴 다음엔 빨아서 널어야 하는 수고로움 없이 그저 쓰레기통에 넣어버리면 되는 쿨 함에 중독되었다. 그 편함의 맛을 알고 나니 행주를 물에 적셔 식탁에 묻은 얼룩을 닦은 다음 다시 깨끗하게 빨아서 널어야 하는 수고가 구만리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한 장씩 뽑아 쓴 물티슈가 쓰레기통에 차곡차곡 쌓이고 다른 쓰레기들을 축축하게 적시면서 순식간에 3L를 가득 채웠다. 물티슈가 편하긴 하지만 유해 물질이 없을 수 없고, 썩는 데 걸리는 시간도 상상을 초월해서 환경오염에도 치명적이니 안 쓰는 게 정답이다. 사실 물티슈 없던 시대에도 잘 살았다. 편리에 중독되어 단번에 끊는 건 힘들지만 조금씩 사용 횟수를 줄여 가면서 결국에는 끊어내도록 해봐야겠다. 환경에 대한 죄책감도 덜고 쓰레기통 비우는 빈도도 줄일 수 있는데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쓰레기인 줄 모르고 가지고 있는 것들도 많다. 옷장에 걸려 있으니 옷인 것 같지만 몇 년째 입지 않고 걸려만 있으면 그래도 옷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별한 날 신으려고 산 하이힐을 한 번 신고 3년 동안 신발장에 고이 모셔만 두었다면 그래도 구두라고 할 수 있을까. 안 입으면서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옷들, 신발들, 가방들이 많다. 가지고 있으면 입을 것 같고, 신을 것 같아서 시원하게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인데 작심하고 버리고 나면 무엇을 버렸는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깨끗하게 잊힐 것이다. 그것들은 사실 옷장에 걸린 미련이고 신발장에 놓인 질척거림이다. 오래 입어 낡은 옷들도 때가 되면 버려야 한다. 보풀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소매 끝이 닳아서 구멍이 나려 할 때까지 입었다면 이젠 보내 주어야 할 때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쉬이 결단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며 서랍 속에 묵혀두었다가는 집이 하나의 거대한 옷장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하나를 사려거든 하나를 버리라는 엄마 말씀이 옳았다. 그렇지 않으면 수납장을 계속 사들여야 하고 그렇게 늘어난 수납장들로 집은 점점 좁아진다. 제 때 잘 버리는 일이 내 삶의 질에 이렇게나 영향을 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쓰레기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그들 중에도 특별히 신경이 많이 쓰이는 하나가 있다. 집안일 중에서 가장 하기 싫은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라고 말할 것이다. 집안에 오래 둘 수가 없다. 냄새도 나고 물기가 있어 위생적으로도 괜찮을 리가 없으니 이삼일에 한 번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자주 버려야 한다는 것도 싫지만 집 밖으로 나가서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그 일을 가장 하기 싫은 집안일 1등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나만 그럴 리가 없다. 길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집안일 중에 하기 싫은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십중팔구는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 많은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나 시스템들이 등장할 수 있었을 거다. 심지어 음식을 집에서 해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집에서 편안하게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사람이 사는 데 어느 정도의 음식물은 버려질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였고 따지고 보면 쓰레기가 되기 전엔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식재료들이 냉장고에서 쓰이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일은 없도록 하려고 신경 쓰고 있다. 돈을 주고 쓰레기를 산 꼴이 되고 싶진 않다.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느낀다. 혼자 살아도 쓰레기가 많이 나와서 놀랍고 행여나 제때 비우지 않고 하루 이틀 버티기라도 하면 쓰레기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찝찝함에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일 일인가 싶어 의아하다.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생각하면서 하기가 싫어서 차일피일 미루던 일을 해내고 나면 후련해지는 것처럼 쓰레기통 뚜껑이 잘 안 닫힐 때까지 미루다가 마음먹고 비우고 나면 쾌감이 느껴진다. 쓰레기통 하나 비웠을 뿐인데 뭔가 큰일 해낸 듯 뿌듯하고 필요 이상으로 개운하다. 묘하게 그저 쓰레기통을 비웠을 뿐인데 마음이 비워진 기분이 든다. 사서 채울 때의 만족감보다 버려서 비울 때의 쾌감이 더 크다는 걸 알았다. 어느 때부터 물건을 살 때 마냥 좋지만은 않더라. 꼭 필요한 걸 적당한 가격에 잘 샀을 때야 말할 것 없이 만족스럽지만 쓰지도 않을 걸 그저 모양과 색이 이뻐서 갖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사버린 날엔 기분이 찜찜하다. 그런데 버리는 기분은 가질 때의 기분과 비교하면 티끌 하나 없이 홀가분하다.
쓰레기 버리기가 귀찮고 성가시다고 대충 아무렇게나 해버릴 수 없다. 삶은 거대한 한방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소소함의 조각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침밥 해 먹기, 빨래하기, 청소하기, 설거지하기 같은 매일 하고 있는 일들이 모여 삶이 된다. 밥은 대충 챙겨 먹고, 밥 먹은 그릇들은 개수대에 겹겹이 쌓아두고, 쓰레기통은 넘쳐나는데 못 본 척 하고 있다면 물어봐야 한다. 과연 이것들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도대체 삶의 참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 헤매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