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는 말들>이라는 우체통에 편지를 보내는 작업을 멈춘 지 꼭 일 년이 되었네. 사유원에 다녀와서 쓴 편지 이후의 휴식이 길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 사유원에 갔던 이야기가 나왔었잖아. 사유원에서 마셨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참 맛있었다는 얘기를 했었지 아마. 너는 작년이라고 했고 나는 작년이었나.. 하고 믿을 수 없어했지. 좀 더 오래된 일인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 돌아와서 그때의 편지를 찬찬히 읽어보면서 기억력이 아무리 좋아도 기록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했어. 글이 그래서 좋잖아. 사진 하고는 또 다르게 들춰보는 맛이 있거든. 아무리 좋았던 일들이라도 기억에는 한계가 있고 사진은 어느 한 순간만을 포착할 수 있을 뿐이잖아. 사진에 담긴 한 장면의 앞과 뒤, 위와 아래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글은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좋아. 더 자주, 더 자세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예쁘게 포장하는 글 말고 본 것, 들은 것, 이야기 나눈 것들을 미래의 나의 행복을 위해 저금하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고 자세한 글이 좋을 것 같아. 왜 글에는 그런 매력도 있잖아. 그 순간에는 좋은지 몰랐던, 일상의 어느 순간에 대한 기록인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읽어볼 땐 ‘아, 이때 참 좋았구나, 행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혹은 참 힘든 순간들에 대한 기록들을 나중에 들춰보면 ‘잘 견뎠구나, 잘 지나왔구나’ 하며 대견스러운 자신을 마주할 기회를 주기도 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참 좋아. 역시 여름은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에 참 좋은 계절인 것 같아.
6월의 저녁 6시와 7시 사이의 바람은 질리지도 않고 여전히 좋더라. 요즘은 햇볕이 너무 뜨거워져서 해가 있는 시간 대에는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하기 힘드니까 해가 질 즈음에 산책을 나가곤 하거든. 초여름의 6시는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뜨거운 볕은 물러가고 쾌청한 바람이 주인이 되는 시간이더라. 겨울바람은 차갑고 날카롭잖아. 숨을 들이마시면 쨍하고 차가운 공기가 몸속 깊이 들어와서 온몸을 떨게 만드니까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야. 봄바람은 상냥하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뺨에 닿는 바람이 차가웠는데 어느새 찬 기운은 사라지고 부드럽고 인자하게 봄 인사를 건네니까. 그리고 여름바람은 바람의 인생에서 가장 높은 몸값을 자랑하지. 한낮 뜨거워지는 뙤약볕 아래서 여름 냄새가 밴 바람이 쏴-하고 지나가면 '아,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오잖아. 초여름의 바람은 아마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아. 왠지 바람에 수줍은 흥분이 묻어있는 것 같거든.
바람이 사라져 버리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아? 나는 요즘 바람이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가슴 깊이 느끼고 감사하고 있어.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어. 집에서 무기력하게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앞뒤 생각 없이 무작정 밖으로 나가볼 때가 있거든. 그럴 때 '바람 쐬러 가다 '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다 싶어. 고여있는 공기가 아닌 흘러가는 공기를 만날 때 그 흐름에 편승해서 기분도 에너지도 내 안에서 고이지 않고 흐르게 되더라. 바람이 활기를 불어넣어 주더라고. 참 경이롭지. 얼마나 다행이야. 이렇게 귀한 바람이 공짜라니 말이야.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세상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누릴 수 있잖아. 이미 엄청난 부자였던 거야 우리는. 진짜 귀하고 값진 건 모두 다 누리고 있었어.
지난 토요일 아침에 기온은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6월의 바람을 믿고 현자랑 운동을 갔어. 요즘 우리의 운동 코스는 워터파크를 지나서 디자인 공원까지, 걸어서 1시간 정도 되는 산책길이야. 워터파크는 너 양산 왔을 때 몇 번 함께 가서 산책도 하고 커피도 마셨던 그 공원. 공원에 있는 큰 연못에 연꽃이 얼마나 이쁘게 피었는지 감탄을 연발하면서 여름 꽃놀이를 즐겼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양산은 참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을 질리지도 않고 매번 하게 돼. 워터파크에서 디자인 공원 사이에는 여러 아파트 대단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그 아파트들의 뒷길을 정비해서 하나의 산책로로 만들어 놨거든. 평평한 평지에 쭉 뻗은 직선 코스의 산책길 양옆엔 나무가 줄지어 있어서 언뜻 숲길을 걷는 듯 기분 좋게 걷기 딱 좋은 길이야. 길 옆 배드민턴장에선 가족들, 친구들끼리 배드민턴 치고, 놀이터에는 서너 살 꼬맹이들이 아빠랑 미끄럼틀을 타고, 가슴줄 묶고 산책 나온 반려견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모습들이 평화로움 그 자체였어. 그런 주변의 풍경들에 취해 걷고 있는데 아빠랑 여동생이랑 자전거를 타러 나온 일곱 살 꼬맹이를 만났거든. 일면식도 없는 아이가 우리 옆을 지나가면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는 거야. 그 느리면서 당당한 목소리, 무심한 듯 담담한 표정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우리 쪽에서도 손을 흔들면서 ’ 안녕‘하고 인사해 주었는데 그런 상황들이 참 좋더라. 재밌는 건 우리가 목표지에 도달해서 삼사십 분을 쉬고 볼일까지 보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그 아이를 만난 게 아니겠어. 그 아이는 우리를 기억하는지 어떤지 또 인사를 하는데 우리 역시 맞장구를 쳐주면서 즐거워했다. 내가 그렇지 못해서인지 아이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스스럼없이 먼저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이 참 좋아. 그런 아이들은 부모가 걱정할 게 없겠다 싶은 마음이 들더라.
목적지에 도착해서 그늘에서 바람 쐬며 충분히 쉬고 나서 근처에 '안녕, 고래야'라는 오래된 동네책방이 있어서 들렀어. 기대하지 않았는데 참 오랜만에 책이 주는 설렘을 만끽했다. 그림책을 주력으로 하는 책방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거든. 큐레이션 된 그림책 한 권을 무심코 골라서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황홀한 비명을 질렀다.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여리면서도 당당한 글과 그것과 꼭 어울리는 그림이 펼쳐지는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더라. 집어드는 족족 신선하고, 단순하지만 철학적이고, 꾸밈없이 솔직해서 빠져드는 책들이었어. 한 권만 고르자 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도저히 발견한 이상은 거기 두고 돌아올 수 없는 책을 한 권 골랐어. 제목만 들어도 왜 이 책이었어야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걸. <엄마 말고, 이모가 해주는 이야기>라는 책이야. 첫 페이지의 글을 소개해볼까.
어제 옆 학교 다니는 중학생 오빠한테 반해서
이 마음을 어쩌면 좋을까 하고 있었거든.
수학은 이제 포기해야 하나 하던 중에 내 친구들이
나 빼놓고 맛있는 거 먹고 온 것 같아 찜찜했는데 말이야.
근데 오늘 나는…7살 아들이 있는 거야. 게다가 남편도 있어!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을까 궁리를 해야 하고
흰머리가 많아져 가르마를 옆으로 바꿀까 고민 중인 거지.
정말 이상하지? 나도 정말 이상하다니까.
너희도 내일 그럴지도 몰라. 그런 마음일지도 몰라.
그러니,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겠지?
소복이 이모가
이 글을 읽고 어떻게 책을 사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 짧지만 통찰이 있는 글과 수수하고 정직한 그림이 매력적인 이 책을 보면서 어쩜 이렇게 내 마음이랑 똑 같을까하며 감탄했다. 책방과의 인연에서 첫 출발이 좋았어. 그림책을 좋아하고 좋은 그림책을 사람들에게 많이 소개하고 싶은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이 작은 책방을 앞으로 자주 가게 될 것 같은 예감이야. 책을 골라 책방을 나오면서 "다음엔 승희랑 같이 와야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더라. 다음에 양산에 오면 꼭 데려갈게.
바쁜 6월 건강 잘 챙기고 한층 더워질 7월에 기쁘게 만나자.
2023.6.20
오랜만에 편지 쓰기를 재개하는 기념으로 새로운 키보드와 마우스를 장만해서 신난 은성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