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 노인학대 영화 아닙니다.
코엔 형제의 2007년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粉)라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헤어스타일의 악역과 함께 독특한 원제의 소설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영화는 1980년대 우연히 총격전 속에서 이백만 달러가 들어있는 가방을 습득한 주인공 모스와 가방을 뒤쫓는 쉬거, 보안관과의 추격전이 영화의 주된 플롯으로 진행된다. 상당히 절제된 분위기의 시퀀스 속에서 긴장감과 어딘지 모를 불편함은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상영 시간 내내 폐부를 찌르는 듯한 느낌을 주곤 한다.
제목의 ‘노인 | Old man’이란 단어는 오랜 경험으로 지혜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며(이 영화에서는 보안관인 벨이 그 역할을 차지한다.), 영화의 배경은 1980년대 미국의 혼란스러웠던 모습을 표현하는 한편, 지혜로운 노인의 지식이 통하던 농경사회를 지나 도달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이 현자의 이성으로도 예견할 수 없는 혼돈한 사회로 변모했음을 나타낸다. 배경과 함께 두드러지는 안톤 쉬거의 혼란스러움과 예측 불가능은 세상에 부조리함이 가득함을 더더욱 진하게 그려낸다.
점점 사회가 고도화되고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회와 불확실성의 바람은 더 빨리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AI와 그로 인한 인력의 대체는 물론 트럼프발 기묘한 국제 정세와 기후 변화까지. 어쩌면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현실들이 우리 주변에 산재하는 모습을 본다. 여기에 순응하던, 자신의 방법으로 빠르게 대응하던, 영화 속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누구보다 필요한 것 같다. 또 어쩌면 이를 예견한 코엔 형제와 원작 소설의 선지자적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
#2. 지성도 무지성도 아닌 반지성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배경이 ‘무지성 사회’, 그 반대가 될 노인의 나라가 ‘지성 사회’ 라면 오늘날의 우리나라는 ‘반지성 사회’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편가르기와 프레이밍으로 무장하고, 내 생각과 반대되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 그 자체를 공격해 격추시키는, 편한 길을 택하려는 ‘반지성’ 말이다. 필자는 진실에는 그에 맞는 불편함이 따라온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직시하고 마주할 때 그 사실을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이 세상의 어떤 일로부터 레슨을 얻기에도 꽤나 많이 미숙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예컨대 몇달 전 삼성전자 반도체의 파운더리 생산 능력을 지적하고, TSMC 대비 기술력에 개선이 필요하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다. 그런데 그 기사의 댓글에는 ‘한국 사람이 삼성전자를 욕하고 대만 기업을 옹호한다’는 둥의 의견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명명백백히 수주 실적과 재무제표로 드러나는 결과를 알려주는 기사임에도 말이다.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시장에서 밀린 기업을 한 줌의 사람들이 옹위한다 한 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당연히 기업 수뇌부와 연구진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대응하고 있겠지만(혹은 그래야만 하겠지만) 현실을 보지 못하는, 아니 보기 싫어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눈에 남았다.
더군다나 왜곡된 정보를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편향된 미디어가 빚어낸 환장의 콜라보가 오늘날 우리 사회상으로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다. 소위 말하는 찌라시와 국뽕 뉴스는 물론, 연예인 스캔들에 정치권까지 그 모습은 가히 가관이 아닐 수 없다. 한 때 ‘가xxx연구소’와 같은 자극적이고 편향적인 채널이 유투브 슈퍼챗 수익 기준 전세계 1위였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런 소위 ‘가짜뉴스’를 걸러낼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매체를 검열하는 기관은 있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곧 1984‘의 빅 브라더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처럼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무엇을 판단하는 기관이나 주체가 있다면, 그것이 편향될 가능성 역시 항상 견지해야만 한다. 결국 성숙한 매체 소비와 책임 있는 미디어 생성만이 이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3.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잘먹었다고 소문이 나나요?
그에 더해 시대를 읽고 진실을 말할 용기와 통찰을 지닌 어른의 부재가,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결핍인지도 모르겠다. 여러 세대에서 두루 인정받을 만큼 흠결이 없는 인물 자체가 드물고, 설령 그런 분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의견이 지금의 사회에서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각자가 서로를 불신하고, 경험보다 데이터가 우선되는 시대 속에서 어른의 말은 때로 낡은 훈계처럼 들리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통찰을 지닌 어른이 부재하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가장 뼈아픈 단면이다. 가치의 혼란과 판단의 피로 속에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목소리가 사라진 사회는 결국 기준을 잃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이만 먹은 ‘늙은이’와 ‘어르신’(지금까지 언급한 노인과 궤를 같이 한다)는 분명히 다르다. 나는 훗날 늙은이 대신 어르신으로 남아있고 싶다. 그렇기에 메타인지력을 기르고,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을, 언제부터, 어떻게 견지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곱씹게 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청년의 시선으로 노년층에 내가 기대하는 바는 청/장년층에 자연스럽게 자리 내어주는 모습과 내가 살지 않았던 과거의 경험들을 공유하는 어른의 모습이다. 나아가 반복될 미래에 나타날 모습에 대한 혜안이 필요하다.
반대로 노년 세대가 지금의 청년들에게 기대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난 노력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랄 것이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이 현실의 무게를 잊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젊은 세대가 빠르게 달려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너희도 언젠가 이 무게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
결국 그들의 바람은 거창하지 않다. 서로 조금만 이해하고, 각자의 자리를 존중하며,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더라도 인간적인 예의와 따뜻함만은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또 누구나 스스로의 Prime time을 회상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결국 세대 간의 문제는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자리를 내어놓는 용기’와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유연함’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늙은이와 어르신의 차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갈린다. 나는 시대가 변해도 스스로의 자리를 고집하지 않고, 다음 세대를 응원할 수 있는 어른으로 남고 싶다. 그것이 내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노년의 품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