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만 원 때문에 내용증명을 보냈다

설마가 사람 잡을 뻔했다

by 이슬기

예전에 꽤 규모가 있는 기업에서 연락이 왔었다. 세미나 랜딩페이지를 만들어달라는 의뢰였다. 기업 이름도 있고 공식적으로 진행되는 세미나라 신뢰가 갔다. 홈페이지 제작 자체는 선금을 받고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쎄한 신호가 있었다.


견적을 보내고 나니 20만 원을 깎아달라고 했다. 그래서 조정했다. 그런데 거기서 또 10만 원을 더 깎더라-.


안 된다고 했더니 담당자가 사비로 10만 원을 보내왔다. 회사 예산이 아니라 개인 돈으로..


그 순간 뭔가 꺼림칙했다.

'뭐.. 예산 사정이 있겠지' 라며 애써 그 신호를 무시했다.


작업 중간에 AI 이미지 작업이 추가됐다. 비용이 더 든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물쩡 넘어가시더라-.

이미지는 사용하고 싶다면서 비용 이야기엔 '아하하 그렇군요~'라고 웃어넘기셨다.

나도 그때는 초반이라 '서비스로 해드리죠' 하고 그냥 진행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이미 주도권은 넘어갔었다.


홈페이지 제작은 잘 마무리됐고 세미나까지는 두어 달 정도 남은 상황이었다. 중간에 수정할 내용이 많아 유지보수가 필요했다.


비용은 15만 원. 실시간으로 수정 요청이 오고 바로바로 반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선금을 먼저 받아야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때 내 머릿속에는 딱 하나의 생각만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기업에서 15만 원을 안 줄 리가 있나?


그래서 먼저 작업을 시작했다.

세미나가 끝났는데 연락은 없었다. 한 달이 지나도, 세 달이 지나도 말이다.

전화는 받질 않고 카톡은 계속해서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세금계산서는 7개월 전에 이미 발행한 상태였다. 서류상으로는 끝난 일이었고 돈만 들어오면 해결되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고민했다. 15만 원...

그냥 넘어갈까?


내용증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니까 번거롭기도 하고 이 금액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근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고작 15만 원이라고 넘어가면
다음에 더 큰 금액에서도 넘어가게 되겠지?


그리고 이번에 한 번 해봐야 나중에 진짜 큰일이 생겼을 때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6개월 차에 내용증명을 보냈다.

인생 처음이었다.


보내자마자 연락이 왔다.

'휴가라서 못 봤습니다.'


7개월 동안의 미수금. 내용증명 보낸 당일에 바로 입금이 됐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다른 기업에서 세미나 랜딩페이지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왔다. 역시 이름이 있는 곳이었다.

제작 완료 이후 유지보수 요청이 들어와 비용을 안내드렸더니 "내일 보내드릴게요, 일단 먼저 작업 부탁드려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예전의 나였으면 해줬을 거다. '이 정도 곳에서 설마' 하고 말이지.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선례가 있다.

그래서 입금 확인 후 작업 시작하겠다고 안내드렸다.


솔직히 그 금액 떼여도 당장 큰 타격은 없었다. 하지만 한 번 먼저 해주면 다음에도 또 해달라고 한다.


호의는 금방 당연한 것이 된다. 그리고 당연해진 순간 금액을 지불하지 않는다. 적은 금액이라도 그렇게 습관을 만들어야 기준이 생긴다.




그 이후로 나는 유지보수도 반드시 선금을 받고 시작한다.

규모가 크든, 이름이 있는 곳이든 '설마'로 일하지 않는다.


이 경험이 지금 우리가 모든 작업에 선금 기준을 두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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