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 내 이름은 양아이다. “김양아 커피 한잔. 둘셋둘! “나는 셋셋둘!” 한 사람이 나를 부르면 연달아 내 이름이 호명된다. 나는 암호같은 말들을 잘 외워서 실수없이 일을 처리한다. 아침에 커피를 한잔씩 마셔야 그들은 좀비에서 사람으로 변신한다. 특히 백 킬로가 넘는 과체중에 배가 많이 나와서 앉는 의자마다 아작을 내놓기로 유명한 김계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찾는다. “나는 설탕을 좀 많이 넣어줘. 김양이 타주는 커피가 제일 맛있단 말이야. 요 앞 영천다방 커피도 못 따라가지. 김양 커피 마시려고 회사 오는 거야. 흐흐” 당뇨가 의심스러우나 한스푼만 적게 넣어도 알아차리고 타박하니, 한 숟갈을 더 넣어 준다. “설탕 아끼고 그러면 양아가 아니라 양아치야” 본인의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혼자 웃는다.
후후룩, 후루룩. 삼삼오오 모여 어제밤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키득 거린다. 거래처에서 납품 단가를 후려쳤다고 들었는데 영업이 잘 됐던 것인지 부장의 얼굴이 밝다. “다들 수고했어. 어제 이대리 보니까 분위기를 잘 띄우던데 요런 재간둥이를 어디서 데려왔나 몰라” 부장이 내뿜는 담배 연기 사이로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손사레를 치는 이대리가 보인다. 그들은 간밤의 술을 커피로 해장중이다.
책상 위에 담배꽁초를 치우는 일도 내 몫이다. 재떨이에 침이나 뱉지 않으면 좋으련만 회사생활이 내 맘대로 되나. 누가 어떤 담배를 피는지 줄줄 외워서 실수 없이 사다주는 일도 내 업무다. 짠돌이 김과장에게 500원 더 비싼 솔을 사다줬다가 사무실이 떠나갈 정도로 혼이 났다. “니가 하는 일이 뭐야? 업무가 왜 이따위야!” 동시다발로 쏟아지는 실수 없이 업무를 잘 해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 자신이 대견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지만 직장생활이 그런 것이니 울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월급이 일주일, 보름, 한달 밀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수군수군 거리면서 회사 망하는거 아니냐고 농담을 했지만 이 큰 회사가 망할 리가 있겠냐. 회장이 가진 경기도의 땅만 팔아도 10년은 거뜬할 거라고 총무팀의 이 양이 말했었다. 우리 회사가 망하기 전에 ‘동서 커피’가 더 빨리 망할테니 걱정 말라고 엄마한테도 말했다. 오늘 출근을 하니 사람들이 심상치 않게 모여 있다. IMF가 어쩌고 하는데, 나하고 상관 없는 일이니 나는 내 일이나 열심히 하면 된다. 둘셋둘. 셋셋둘. 커피를 타려는데...
“김 양. 알다시피 회사가 어렵게 됐어. 그래서 말인데... 정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인원을 감축해야 할 것 같아. 다음주부터 안 나와도 돼” 저요? 제가 없으면 커피는 어찌 드시려고요. 제가 얼마나 일을 많이 한다고요. 저 없이 괜찮으시겠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하지 못했다. 발끝만 보고 복도를 지나는데 총무팀에서 소리가 들린다.
“이게 바로 믹스커피라는 신제품이야. 이 안에 커피랑 설탕이랑 프리마가 다 들어있다네. 요렇게 모가지만 딱 따서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되니까 다들 알아서 타 먹게 하면 된다고. 요거 한 박스씩 사무실로 갖다놔요.”
모가지만 딱 따서 들이붓는 믹스커피. 모가지만 딱 따서...
*키워드 글쓰기는 매일 아침 친구가 던져주는 키워드에 맞춰 한시간 이내로 짧은 글을 쓰는 겁니다.
떠오르는 단상을 빠르게 캐치해서 쓰는 글이니 가볍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