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여기에는 사람이 살았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온기에 대하여

Contax G2, Kodak 200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머릿속을 비우고 싶었다.

그저 복잡해진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않은 채

발이 이끄는 방향으로 걷고 싶었다.


계획이 없는 걸음은 늘 느리다.

느린 걸음은 주변을 보게 만들고,

그렇게 걷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날,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나는 이 풍경을 마주했다.


사진 속에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은 비어 보이지 않는다.


돌담의 높이,

지붕의 기울기,

골목의 폭이 말해준다.


여기에는 분명 사람이 살았다고.

아침을 맞았고,

저녁을 보냈고,

하루를 견뎌냈다고.


누군가는 이 길을 매일 걸었고,

누군가는 이 돌담에 기대어 숨을 골랐을 것이다.

누군가는 같은 문을 수없이 열고 닫으며

자기만의 하루를 반복했을 것이다.


사람은 떠났지만

생활의 리듬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 골목은

비어 있는데도 조용하지 않았다.


산은 멀리 흐릿하게 자리하고 있다.

선명하지 않은 풍경은 언제나 기억을 닮아 있다.


우리는 또렷한 장면보다

조금 흐릿한 장면에 더 오래 머문다.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리에 마음이 들어갈 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기억도 그렇다.

모든 것이 분명한 기억보다

어딘가 비어 있는 기억이

오래 남는다.


요즘의 시간은 너무 빠르다.

하루는 소비되고,

하루는 사라진다.


무엇을 했는지보다

무엇을 남기지 못했는지가

더 선명해지는 시대다.


바쁘게 살았다는 말은 흔하지만,

살았다는 느낌은 점점 희미해진다.


그래서 이 골목이

낯설면서도 편안했다.


이곳의 시간은

쓰이지 않고, 쌓인 것처럼 보였다.

성과로 증명되지 않았고,

기록으로 남기려 애쓰지도 않았다.


사람의 발걸음,

숨,

생활의 온도가

겹겹이 포개져

그 자체로 풍경이 된 느낌이었다.


나는 셔터를 누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삶이란 어쩌면

잘 사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남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의 시간을 지나왔는지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이 사진은

과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지금의 나는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는지를.


바쁘게 지나가기만 하는 하루 속에서

나의 시간은

누군가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온기로 남고 있는지를.


그리고 이 사진은

내게 이렇게 말을 걸어왔다.


사진이 나에게 건넨 한 문장


“서두르지 않아도, 너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