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준비를 이미 끝낸 것들의 태도에 대하여
이 풍경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말을 고르지 않았다.
고르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말이 굳이 필요 없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벚꽃은 늘 그렇다.
피어 있는 순간보다
곧 질 것이라는 사실이 먼저 도착해 있는 존재.
그래서 우리는 벚꽃을 보며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을 느낀다.
아름다움과 상실이 같은 시간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사진 속의 나무들은 한 방향으로 서 있지 않다.
각각의 줄기는 조금씩 기울어 있고,
가지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어수선하지 않다.
오히려 질서정연해 보인다.
아마도 이 나무들은
같은 목적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함께 있어야 한다”,
“같은 방향을 봐야 한다”,
“끝까지 버텨야 한다”는 말들을 쉽게 한다.
하지만 이 벚나무들은 다르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식으로 피어 있다.
누구도 옆의 나무를 의식하지 않고,
누구도 경쟁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나무들은 자신이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 나무들 아래에는
수많은 봄이 지나갔을 것이다.
아이들이 자랐고,
연인이 걸었고,
누군가는 이별을 했을 것이며
누군가는 혼자 앉아 시간을 흘려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벚꽃은 그런 기억들을
결코 증언하지 않는다.
그저 매해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피고 질 뿐이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며
‘기억하려는 태도’와
‘그냥 지나가게 두는 태도’의 차이를 생각했다.
우리는 무엇이든 의미를 붙이고 싶어 한다.
이 순간이 특별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 하고,
이 장면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벚꽃은 그런 확인을 요구하지 않는다.
벚꽃은 말한다.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순간은 충분히 순간일 수 있다고.
기억되지 않아도
존재는 완성될 수 있다고.
이 사진이 흑백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적절하다.
색이 빠진 풍경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분홍빛의 설렘도,
봄날의 들뜸도 없다.
남아 있는 것은
형태와 밀도, 그리고 시간의 결이다.
이 벚꽃들은
‘예쁘다’는 말 대신
‘지나간다’는 사실만을 남긴다.
나는 이 나무들 아래에 앉아
오래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잠시 걷다가
사진 한 장을 남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간 뒤에야
이 풍경이 조금씩 스며들었을 것이다.
어떤 순간들은
현장에서보다
이후에 더 오래 남는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대부분
피어 있는 동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살아내는 동안에는
그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른다.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아, 그때가 봄이었구나.
아, 나는 그 시간 속에 있었구나.
이 벚꽃들은
사라질 준비를 이미 끝낸 얼굴로 서 있다.
그래서 조급하지 않고,
그래서 아름답다.
붙잡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기억된다.
사진이 나에게 건넨 한 문장
“머무르지 않아도 괜찮다.
너는 이미 충분히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