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벽에 남은 빛

비추지 않아도 충분한 역할에 대하여

Canon EOS 5D Mark II, EF 35mm, f2, 1/250s, ISO 200

멀리서 다가오지 않는다.

천천히 밝아지지도 않는다.

이미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벽에 붙어 있다.


빛은 대개

앞을 밝히는 역할을 맡는다.

길을 보여주고,

그림자를 밀어내고,

다음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런데 이 빛은 다르다.

어디로 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벽을 비추며

자기 몫을 조용히 해낸다.


둥근 전구 하나가

벽에 남긴 온도는

생각보다 오래 머문다.

강하지 않아도

충분히 따뜻하고,

눈에 띄지 않아도

분명 존재한다.

빛은 소리를 내지 않지만

공간의 태도를 바꾼다.


복도는 길다.

빛은 반복된다.

모두 같은 모양,

모두 같은 거리.

그러나 어느 하나도

쓸모없는 자리는 없다.

이 줄지어 선 빛들은

서로를 경쟁하지 않는다.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은 채

각자의 위치를 지킨다.


이 사진을 바라보며

삶의 ‘배경’을 생각한다.

주목받지 않는 자리,

이름이 불리지 않는 역할.

하지만 그곳이 없으면

공간은 금세 식고,

사람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늘 중심에 서지 않아도 된다.

앞을 이끌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가 지나갈 때

편안함을 남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순간도 있다.

빛은 언제나

전면에 있을 필요가 없다.


이 벽의 빛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남아 있는 듯하다.

“여기 있어도 괜찮다”라고.


사진이 나에게 건넨 한 문장


“세상을 밝히지 않아도,

공간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