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에게 술은 강요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시지 않으면 갈증이 차올랐고,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통스러웠다.
당연한 듯 마셔야만 하는
산소와도 같은 존재였다.
지금의 나에게 술은 선택이다.
의존도, 습관도 아닌
마치 라면 같은 존재랄까.
좋아하고 먹고 싶지만,
매일 먹지는 않으려 하는.
선택의 영역으로 옮겨진 술은
역시나 보리차를 선택해 채운다.
어쩔 수 없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이해시키려 노력하고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럴 수밖에 없음을 어필하고
공감을 강요하곤 했다.
나의 부족함을 감추려 했고
그의 장점을 운으로 덮었다.
주변 보니까 다들 그런데 뭐 어때.
이런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다.
어쩔 수 없다 여길 때에는
정말 다른 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이해하려 노력하되, 동화되려 하지 않는다.
수용하고 이해하는 영역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영역을 분리한다.
사람이 아닌 그 행동에 초점을 맞춰
필요한 지점을 분리하여 이해한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리며
그 상황을 상상하고 그려 본다.
내 안에는 수많은 버전의 내가
각각의 상황에 맞춰 살아간다.
어쩔 수 없다는 표현 아래
선택지는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에는
선택이 담겨있다.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술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 아니라,
보리차를 마시며 정돈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이 방법 밖에 없다며 울분을 토하는 대신,
다양한 선택지를 두고 결정할 수 있다.
극단적인 선택지만을 바라보았다.
술을 마신다 vs 술을 안 마신다.
분명 맥주 대신 보리차의 연재 초반에는
전혀 마시지 않을 다짐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직접 마시지 않고 겪어 보니,
단순한 금주가 내게 필요하지 않았다.
보다 스스로에게 어렵고 필요했던 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용기였다.
마지막 글에 이른 지금,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선택할 수 있음은 핑계가 되어선 안된다.
간혹 유혹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핑계로 작용할 때에는 단호해진다.
핑계로 사용된 선택은
어쩔 수 없다로 돌아간다.
금주라는 강요 아래 보리차를 마실 때와
스스로의 선택 아래 보리차를 마실 때.
전혀 다른 맛이 난다.
씁쓸하고 밋밋한 아쉬움의 맛이기도
구수하고 풍부한 따스함의 맛이기도.
같아 보이는 결과에도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반성은 하되, 후회는 말자'
라는 좌우명으로 살아왔다.
어쩌면 이 좌우명에 담겨 있는 강요로
나는 후회할 수 없는 선택뿐이지 않았나.
지금에서야 좌우명에 대해 이해한다.
선택할 수 있기에 더욱 또렷하게
나를 위한 결정을 할 수 있다.
앞으로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할 테니까.
맥주의 유혹에 흔들릴 때마다
맥주 대신 보리차 연재글을 본다.
거짓말처럼 숨이 트이고,
다시 보리차를 끓였다.
처절했던 시작부터,
초연해진 지금까지.
중심이 흔들릴 때 나를 잡아주는 글이 되었다.
누군가, 나와 같은 이에게
필요한 순간에 전해지기를.
그리고 언제나,
그대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