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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특급썰렁이 Aug 14. 2024

나의 일생

니는 누구인가

이쯤에서 나의 흔하지 않은 탄생 이야기를 몇 마디 하고자 한다. 당연히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그곳은 지금도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나름 유명한 이름이다. 남구 대연동 유엔묘지. 방금 네이버 검색해 보니깐,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93 "유엔기념공원"이라고 한다. 듣기론, 아버지께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근방에서 부 O우유 대리점을 크게 하셔서 당시 집을 3채나 살 정도로 큰돈을 모으셨다고 하더라. 물론 내가 1977년에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라고 했다. 하긴 1970년대 후반이었으니, 우유는 귀하기도 하고 또 워낙에 인기 있기도 하였던 거 같다. 나의 어렸을 적 사진 2장만 비교해 봐도 백일사진은 흑백 올누드인데 돌사진은 고급아동복을 입은 새련된 컬러사진 그 자체인 걸로 보아, 그나마 첫 돌까지는 제법 살 만했나 보더라.


먼저 경상북도 경주시도 아니고 석굴암 너머 동네인 깡촌 중의 시골이라는 월성 군 양북면 호암리 OOO번지에서 출생한 아버지께서 등판하시게 된다. 아마도 4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일찍이 3명의 누님들이 어려서 병으로 다 돌아가시고 세 명의 형님들만 곁에 있었나 보다. 심지어 맨 첫째 형님하고는 무려 24살 가까이 차이가 있다 보니 형님들은 어렵기만 한 존재였을 듯...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그 며느리인 큰어머니가 사촌 큰형을 임신했다 하면 그 나이차가 ㄷㄷㄷ 암튼 지지리 못 사는 형편에서인지 소학교만 보내고는 어렸을 때부터 죽어라 밭일만 시켰단다. 어린 마음에 이제는 더 이상 지게 지기가 싫어서 들입다 가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워낙에 가방끈이 짧다 보니 써먹을 만한 지식도 기술도 변변찮은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봤자 동네 형님에게서 어쩌다 배운 오토바이 타는 게 기술이라면 기술이었다. 그 기술 하나를 가지고, 큰 형님이 살고 있던 부산으로 무작정 향했던 것이다. 큰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산에서 콩나물공장을 하면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콩나물공장"이라고 말하면 내가 태어나서 여태껏 유일하게 부산에서만 본 건데, 다른 지역 그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공장이다. 이 콩나물공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시커멓고 커다란 콩나물 고무 시루통에다가 콩나물을 잔뜩 넣어서 오랫동안 기른 다음에... 주로 식당, 슈퍼마켓 등지에다가 납품하는 형태였다.  이 콩나물시루를 납품하기 위해서는, 소형트럭보다는 기동력이 좋고 한 통씩 배달하기 쉬운 오토바이가 제격이었다. 마치 LPG 가스통을 배달하듯 콩나물 한 통을 오토바이 뒷자리에 싣고 온 동네 골목골목을 누비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인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오토바이 하나를 얻거나 빌려서 큰형님네 콩나물 배달을 한동안 하셨나 보다. 앞서 기술했듯이, 변변한 기술 하나 없이 오토바이 배달만 해가지고서는 형편이 항상 그 모양 그 꼴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냥 군대나 가자고 생각했다. 대충 1972년 전후 군대에 갔는데 마침 그 무렵에 월남전이 한창이었고, 일반 육군사병들 중에서도 월남전 지원을 받더란다. 원래는 최소 중졸 이상이 되어야만 월남전 지원이 가능한데, 국졸인 학력을 속이고 자신은 중졸이라고 끝까지 우기고 졸라서 드디어 월남전에 합류할 수 있게 된다. 비행기나 헬기는 아닌 거 같고, 무슨 수송선 같은 걸 아주 기나긴 기간 타고 있었더니 베트남에 도착하였다고 하셨다. 몇 안 되는 월남전 시절 사진을 앨범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이름도 유명한 백 O부대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들고 전투하는 모습이 아닌, 대부분 러닝 차림에 선풍기 바람 쏘이며 쉬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주로 후방에서 지원업무를 하시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암튼 그 월남전에서 커다란 바나나잎 아니 야자수잎인가 어디에 그럴듯하게 시를 적고 하신 모양이다. 가방끈이 짧으신 것치고는 필적도 나쁘지 않고 나름 글빨도 좀 있으셨든 듯.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옛날 그렇게도 유행하던 펜팔로 만나게 되신 커플이다. 월남전에 참전 중인 군인 아저씨와 함안 시골 처녀 간에 어떻게 펜팔이 가능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런 식으로 결혼까지 이어진 분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펜팔을 주고받다가 드디어 아버지가 월남에서 돌아오는 날... 아침부터 얼굴도 새까만 키 작은 처자가 콩나물공장에 와서 기다리더란다. 1973년 전역한 그 해에 결혼식을 올린 쥐띠 아버지와 말띠 어머니는 74년에 범띠 첫 딸을 얻는다. 그리고는 76년에 용띠 둘째 딸을 낳았다. 처녀 적부터 고질적인 좌골신경통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는 사실 딸 둘만 가지고는 더 이상 자녀를 가질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주변 누군가가 애를 하나 더 낳으면 그 신경통도 말끔히 나을 거라는 근거 없는 조언을 해 줬고, 결국엔 계획에도 없던 나까지 출산하고야 말았다. 그 이후 또 한 번의 출산으로 인해 신경통은 오히려 더 심해진 것은 물론이고...  딸과 둘째 딸을 낳고 난 당일마다 시어머니는 그냥 말없이 아기의 배냇저고리만 한번 슬쩍 들춰보고서는 집으로 돌아가셨단다. 그 당시만 해도 철저한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시절인 데다가, 하필이면 나의 친가 쪽은 집집마다 아들만 우글우글 대는 아들 풍년이었더라도 그래도 아들이 최고였나 보다. 아버지 형제분들 중에서 유일하게 아들이 없었던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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