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특급썰렁이 Aug 14. 2024

나의 일생 2

나는 어떻게 태어났나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키 157센티에 체중 50킬로 전후 평생을 깡마르게 사신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고도 잘 못 드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집에서 출산하셨단다. 1977년 06월 초여름의 어느 날, 그 당시 누구나 그랬듯이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막 몸을 풀려고 했던 모양이다. 마침 친한 옆집 언니가 방문해서 출산을 도왔는데, 막 태어난 나를 보고서는 "야, 마치 쥐새끼 같다."라고 해서 그 뒤로는 절대 우리 집에 못 오게 했다고도 들었다. 어떻게 몸무게를 쟀는지는 알 수 없으나(아마도 쌀집 저울 같은 걸로 재봤나 싶기도 하지만...) 출생 무게는 달랑 1.7킬로그램에 불과했고, 그래서 곧 죽겠다 싶어서 한동안 어머니 옆에다가 그냥 눕혀 놓았단다 ㅜㅜㅜ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쥐새끼처럼 작고 가냘펐던 나는 죽지 않고 끈기 있게 살아난 건가 보다. 정말 옛날 사람이 맞는 것인지... 그러고도 무려 100일여 가까이 지켜보다가 10월이 되어서야 가리 늦까 뒤늦게 출생신고를 하셨다고 했다. 당시에도 월성 군 시골에 사시던 할아버지께서 직접 출생신고를 하러 면사무소엔가 어디를 가셨는데, 출생지를 불러달라는 면 직원에게 "부산직할시 남구 대연동 OOOO번지"라고 하시자 사투리 발음 나는 그대로 "대현동"으로 호적등본에는 기록을 하였다. 다 알다시피 전산이 당연히 없다 보니, 그 모든 걸 일일이 대장에다가 수기록을 하다 보니 이러한 일들이 참 허다하였던 그런 시절이었었다. 그렇게 나는 태어나고 또 이 세상에 "주민등록" 되었던 것이다. 영양실조다 싶을 정도로 삐쩍 마르고 허약했던 어머니여서인지 출산 이후에 제대로 젖이 안 나왔나 보다. 그래서 내가 알기로는, 나는 엄마 젖 대신에 부 O우유를 먹고 자랐다. 참고로, 내가 태어난 그 어귀부터 아버지 사업에 무언가 삐걱거리는 신호가 오기 시작한 듯하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박스의 우유를 납품하고 여러 명의 직원들을 둘 정도로 잘 나가던 그 우유대리점을 그저 계속 유지만 했어도 좋았을 텐데...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셨는지, 거기에서 만족하지 못하시고 서서히 다른 곳에 눈을 돌리고야 만다. 그것은 바로 그 당시에 우유만큼이나 유명하고 잘 나가던 라면 사업이었다. 것도 금이라도 이름만 대면 대한민국 누구나 다 알 만한 그 이름 삼 O라면을 말이다. 그때만 해도 삼 O라면 이외에는 다른 라면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독점 그 자체였기에, 아마도 그걸 하면 무조건 대박 날 것이라고 판단하신 거 같기도 하다. 암튼 그 삼 O라면 대리점을 그 대연동 우유대리점 근처에다가 했으면 나쁘지 않은 결과를 보실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그 멀리 깡촌 고향으로 가신 지는 지금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고향 땅인 경주에 금의환향한답시고 내려가셔서 라면 대리점을 거하게 차리셨는데, 그게 왜 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홀라당 망해 버리셨다고 했다. 그것도 그냥 망한 정도가 아니라... 연쇄 부도로 인하여 우유대리점은 물론 갖고 있던 3채의 집들 모두 경매로 넘어가고... 말 그대로 처자식 포함 5 식구가 야반도주해서 경주로 도망치듯 쫓겨나듯 내려오게 되었다. 아참... 나의 돌날 다음날 할아버지 제사가 있길래 부모님께 언젠가 여쭤봤는데, 막내 손주 돌잔치 다음날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단다. 왜 굳이 여기서 할아버지 제삿날을 언급하냐면, 위의 라면대리점 부도사태가 나의 탄생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불행사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주로 내려왔다. 사실 이제부터가 나의 기억의 시작이다. 신기하게도 나는 3살 무렵의 나부터 기억할 수가 있다. 세 살이라면 1979년인지 1980년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세 살 때부터 신문을 읽을 수가 있었다. 명절엔가 부산의 큰집에 내려갔을 때 큰집 마루에서 커다란 신문을 펴 놓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고 있던 내 모습은 그로부터 45년 가까이 지난 아직까지도 눈앞에 보듯 선명하다. 왜냐하면 큰집 식구들이 그저 내가 신문을 쳐다보고 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맨 오른쪽 윗부분부터 한 줄 한 줄 아래로 줄줄 읽어 내려가는 모습에 무척 놀라 하던 모습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폭삭 망한 집안 형편 덕분에 가정교육은 고사하고 아버지 어머니 모두 맞벌이해서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시절에 아들 한글공부는 사치에 불과했다고 여겼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리라. 리고 렇게 나의 문자중독 활자중독 책벌레로서의 삶은 시작된 듯하다. 경주에서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의 첫 모습은 이러하다. 정말 작은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아니 처절하게 차곡차곡 쌓여서 산 거 같다. 어떻게 구했는지 말 그대로 단칸방만한 구멍가게 하나가 바로 옆에 붙어 있었고, 그것이 우리 식구의 유일한 밥벌이 중 하나였다. 어머니가 세 남매를 끼고서 하루종일 그 구멍가게를 벗어나지 못하고 맡아보시면서 살림을 꾸려나가셨고 아버지는 무언가 돈을 벌러 매일 밖으로 나가시는 구조였다.

이쯤에서  잠깐 어머니에 대해서 궁금해질 듯하니 그 생애를 잠시 기술하겠다. 어머니는 경남 함안의 첩첩산중 출신에서 2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나셨는데, 일찍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시골 훈장 격의 아버지가 6남매를 건사하다 보니 벌이도 시원찮고 아내 잃은 슬픔에 매일 술까지 드셔 대니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으신 모양이다. 본인 썰로는 중졸이라 하시는데 요즘도 교통이 다소 애매한 함안 시골에서 그 당시 어려운 형편에 여자를 중학교까지 보내셨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어머니를 포함 외삼촌들, 이모들 죄다 공장에서 일하고 고생하고 어렵게 자란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 그런 어머니가 무슨 학식이 있고 무슨 기술이 있어서 반듯한 직업을 가지실 수가 있었을까. 다시 우리 집의 생계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참으로 재밌는 것은, 그때는 경주에 "위생회사"라는 것이 있었다. 위생회사라 함은 옛날에 거의 모든 가정집에 있었던 "재래식" 화장실 즉 "푸세식" 변기와 관련이 있다. 그 푸세식 변기를 사용할 때에는 소위 말하는 한 장씩 떼어내는 달력 달력 종이 혹은 성경책 종이가 적격이었다. 두루마리 휴지도 귀하던 시절이다 보니 달력 종이나 성경책 종이를 한 장 뜯어다가 여러 차례 손바닥으로 비비고 대변 뒤처리를 하던 바로 그 시절이었다. 그런데 요새처럼 물에 녹는 휴지도 아닌 이런 종이들이 녹지 않고 변기 내부로 자꾸 쌓이다 보니 정화조가 막히는 일들이 다반사였던 거 같다. 정화조 혹은 변기가 막히면 위생회사에서 위생차 소위 똥차를 가지고 가서 새파랗고 기다란 굵은 호스를 연결해서 변기 속의 각종 오물들 주로 오줌똥들을 펌핑하여 똥차로 모두 옮겼다. 그 당시에는 그런 가정오물들을 해결하는 하수도 처리시설이 왠지 모르게 부실하였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위생차가 한번 오면 막혔던 변기도 그래서 그 위생회사도 상당한 인기가 있었고 여느 가정집에서든지 자주자주 불러 다니는 그런 업종이었다. 그 위생회사가 바로 우리 집 구멍가게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친구들이 그 회사에 다니고 계셨다. 이 위생차가 출동하는 날은 말 그대로 동네 아이들에게는 축제의 날이었다. 왜냐하면 이 위생차가 어느 가정집에서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그 회사 마당에다가 차에 가득 실고 온 모든 오물들을 부어놓기 때문이다. 그때는 왜 그렇게 그 오물들을 마당에 부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 오물들은 그 특유의 똥냄새만큼이나 값지고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동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에 기다란 나무 꼬챙이를 각각 쥐고서는 그 오물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고 아주 정밀하게 빠뜨림 없이 매의 눈을 가지고 철저하게 분석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다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동전을 발견하는 아이들이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한다. 손바닥만 한 커다란 풀빵이 2개에 고작 50원이던 그 시절, 500원짜리 동전 한 개만 찾아내더라도 그날만큼은 손쉽게 골목대장이 되어 으스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싸움 잘하는 아이도 물론 대장이었지만, 아무리 힘없고 빽 없는 찐따 같은 아이라 할지라도 단돈 100원이라도 손에 쥘 수 있다면 나름 큰소리칠 수 있던 그런 가난하고 또 가난했던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똥통 속에서 찾아낸 귀하디 귀한 동전들은 재빨리 집으로 옮겨져서 세면대에서 가볍게 세척된 뒤 우리 집 구멍가게로 직행하게 된다. 배설된 똥통의 동전들이 다시금 돈으로 환생하고 또 융통되는 또 하나의 창조경제였던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일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