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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특급썰렁이 Aug 15. 2024

나의 일생 4

나의 다소 특이하지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은.

가난이 죄는 아니다. 그렇다고 자랑스러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이 넓디넓은 한반도 중에서도 이북이 아닌 한강 이남의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중산층도 결코 될 수 없었던 그저 그런 평범하지도 못한 지극히 가난한 양가 집안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가? 아침 09시 30분까지만 텔레비전 정규방송을 하던 시절 말이다. 아침 일찍 아버지와 어머니가 오늘도 돈을 벌러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바삐 출근을 하시고 두 누나들도 늦을세라 국민학교로 등교하고 나면, 나는 어김없이 잠시잠깐 집에 덩그러니 홀로 남아있곤 하였다. 불과 한두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긴 하였지만, 아침에 하는 MBC 뽀뽀뽀, KBS TV유치원 하나 둘 셋까지 모조리 다 찾아보고 나면 이내 성 O 새마을유치원에 갈 시간이 된다. 참고로 무지 가난하였던 우리 집 형편에 어떻게 이 유아원에 내가 가게 되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내게 기억이 있을 때부터 이미 맞벌이로 어린 나 혼자 집에 남아 단순방치된 세월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무슨 생각이 있으셨던 건지 아니면 그때 마침 새로이 개원한 그 유아원에 내가 저렴한 가격으로 입학할 수 있었던 나도 모르는 특혜 같은 게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유아원을 먼저 다니고 나서는 그다음에 유치원... 이런 식으로 유아원과 유치원 사이에는 나름 구별이 있는 걸로 아는데, 암튼 나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길은 바로 그곳 새마을 유치원이었다. 그 유치원은 나에게는 별천지였다. 매일 함께 놀던 옆집 앞집 뒷집 건넛집 등등 주변 아이들과만 함께 놀다가, 집에서도 한참 멀리 떨어진 낯선 그곳에서 새로이 만난 친구들은 또 다른 경험이자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만 무려 1년 가까이 다녔던 그 새마을유치원에 대해서 억나는 것은 단 3가지 정도... 첫째, 나의 첫사랑 소녀였던 김소O, 둘째, 매일 점심 무렵이면 나눠주던 하얀 우유, 셋째, 유치원입구 바로 옆에 있던 구멍가게에서 매번 사 먹던 사탕 부스러기들... 새마을유치원 개나리반이었던 나는 같은 반 김소O이라는 친구에게 첫눈에 반했나 보다. 돌아가면서 옆짝이 바뀌다가 어찌어찌 그 김소O과 짝꿍이 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똑 단발머리에 큰 눈망울, 약간은 새침한 듯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참한 아이였다. 매달 있던 단체 생일파티날 함께 사진도 찍고 그저 참 좋아했던 그러나 대놓고 좋아한다고는 감히 고백하지는 못했던 쑥스러운 일방적인 첫사랑 아니 짝사랑의 기억이다. 신기하게도 그 친구의 친언니인 김보 O이 우리 큰누나와 같은 학교 동갑내기 친구였다. 그 김소O 친구집에 한번 찾아갔다가 우연히 그 김보 O이라는 누나친구 아니 친구언니를 만난 적이 있는데, 내 친구인 김소O보다 키만 좀 더 큰 게 다를 뿐 생긴 게 똑같아서 흠칫 놀랐던 기억도 있다.    


오늘 2024년 광복절 이 아침에는 내가 다닌 국민학교 얘기를 한번 신나게 해보고자 한다. 1907년에 개교하여 1911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고 하는 계 O 국민학교가 나의 첫 학교이자 모교이다.  이 학교에서 국무총리도 나왔다고 하고 뭐 각종 장군에다가 유명한 사람들도 꽤 있다고는 이 국민학교 졸업생 중에서 어느 누구 하나 이름 대면 알만한 사람은 하나도 모른다. 암튼 어쨌든 경주시뿐만 아니라 경상북도 일대에서도 오래되고 전통 있는 상당히 유명한 국민학교였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폐교되지 않고 건재하고 있다. 1984년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도합 2500명이나 되는 어마무시한 수의 전교생이 있었다. 콩나물시루처럼 한 반에 50명은 족히 넘는 숫자의 학생들 최대 기억에 55번까지는 있었던 듯하다. 그 당시 인구 10~13만에 불과한 경주시에 왜 그렇게 국민학생들은 많았는지... 혹자는 경주시 전체에서 이 유서 깊은 국민학교에 보내려는 부모들이 빗발쳐서 그렇게 전교생 수가 많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어찌 됐건 1학년 때부터 7반 8반까지 있는 것은 기본이었고 두 자릿수까지 넘어가지 않으면 다행인 그런 시기였다. 1학년 4반, 2학년 5반, 3학년 2반, 4학년 3반, 5학년 7반, 6학년 1반... 어떻게 반이 배정되는지는 몰랐지만, 내 또래 아이들에게는 왠지 모르게 그 반이라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1학년 담임이셨던 손 O 현 선생님은 전형적인 남자 선생님이셨다. 이미 정년 퇴임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듯 다소 지긋한 연세에다가 머리숱이 별로 없는 50대 중후반의 남성, 약간 마르고 왜소한 그리고 자못 험상궂은 얼굴에다가 평소에도 매우 무뚝뚝하셔서 조회 시간 이외에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국민학교 졸업하기 전에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떠돌곤 했다. 암튼 딱딱한 외모만큼이나 엄하기까지 한 그야말로 무서운 동네 아저씨 같았다. 2학년 때 선생님은 여자 선생님이셨음에도 그보다 더 심했다. 적어도 40대 이상의 나이 많고 못 생긴 성격 나쁜 김 O악 선생님... 이름만큼이나 경악스러운 옷차림과 외관에 아이들은 마귀할멈이라고 별명을 지었을 정도다. 담배 피우는 거 아니냐 할 정도로 무언가 행실이 불량함을 달고 다니는 그런 스타일이셨다. 그러다가 3학년이 되어서야 드디어 선생님다운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아직 결혼도 안 하신 앳된 모습의 안 O희 선생님. 누가 봐도 국민학교 선생님 아닌가 할 딱 맞춰진 외모에다가 아나운서 같은 깔끔 단발머리에 수수한 옷차림 순수한 외양은 우리 국민학교 학생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분은 나의 3학년 담임이 되시기 이전부터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은 분이셨다. 그래서 하루하루 학교 가는 날이 좋았다. 선생님이 그렇게 좋은 담임선생님이 있어서 학교 가는 길은 기쁨의 길이었다. 그러던 그 선생님이 갑자기 학교를 옮겨가시게 되었다. 그것도 가까운 곳이 아니라 저 멀리 서울특별시 강동구 송파동이라던가...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서 가시는가 보다 했다. 너무도 슬펐지만, 선생님 잘 가시라고 엽서 한 장 띄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4학년 담임선생님은 다시 중년의 그다지 나쁘지 않은 수준의 남자 선생님 김치 O 선생님. 매일 단정하게 빗어 넘겨 좌우로 딱 붙인 그 머리스타일이 약간 로봇 같았다.

5학년 담임선생님이 충격적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통상 새 학년에 올라가고 반 배정이 마쳐지는 당일에, 각 반 학생들은 투표를 통해 그 해 1년 동안 학급을 도맡아 봉사하게 될 반장/부반장/학습반장/환경미화반장 등등을 선출하게 된다. 숙기가 없어서 1~4학년 내내 조용히 어둡게 살고 있던 나는 잘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었다. 가난한 처지에 내 힘만으로 남들 앞설 수 있는 것은 돈 안 드는 공부 오로지 하나였으니까. 남들은 그 흔한 아이 O풀 학습지를 매일 집에서 손쉽게 받아보던 시절, 나는 아이템풀 배달하시던 어머니 친구분으로부터 배달하다 남은 나머지 학습지들을 받아서 풀어야 했으니까. 공부를 위한 학원은커녕 그 비슷한 것도 다녀본 적이 없다. 어느 날 아버지가 어린이날 선물이랍시고 무언가를 잔뜩 사 오신 적이 있다. 집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책들을 모조리 다 읽어치운 뒤에 맨날 새로 읽을 책이 없다고 투정 대던 그 막내아들을 위해서. 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읽었던 책들은 한국 위인전집과 세계 위인전집이었다. 미취학 아동이었던 내가  읽기에는 택도 아니게 오로지 글밥으로만 잔뜩 채워진 그런 읽기 힘든 재미나지 않은 책들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텔레비전 말고는 변변한 놀잇감조차 없었던 나에게는 유일무이한 장난감이자 친구였던 거 같다. 그래서 100권의 한국 위인전집과 또 다른 100권의 세계 위인전집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여러 번 읽다 보니 자연스레 그 위인들에 대해서 머릿속에 각인이 되게 되었다. 그 책들이 우리 집에 있는 책들 중 거의 전부였고 한동안 그 책들만 계속 읽었던 걸로 기억난다. 아버지는 어느 날 길고 높은 책장을 하나 사 오셨다. 한 5단 정도 높이... 정확히는 사 오신 게 아니라, 집 근처 목공소에서 수제작 한 책꽂이 하나를 저렴하게 사 오신 것이다. 그리고 또 역시 집 바로 근처 어느 빈 가게에 사무실을 차리고 있던 전집 총판 아저씨로부터 책 몇 박스를 사 오셨다. 뭐 괜찮은 양서들을 신중하게 골라오신 것이 아니라, 그저 국민학생 아들이 읽을만한 수준의 책이라면 아무거나 괜찮다고 그냥 팔아라고 하신 거 같았다. 암튼 그렇게 5단 책꽂이를 가득 채울 만큼의 전집류 5박스도 함께 집에 들여왔다. 괴도 뤼뺑, 셜록 홈스, 세계 단편문학소설집 두 박스, 애거사 크리스티 추리소설집... 내 수준에 맞는지 내가 좋아하는지는 차치하고 그저 새 책이 좋았고 그 새 책 냄새는 더 좋았다. 은 집 한 켠에다가 새 책장을 세워놓고 새 책들로 채우고... 천하를 가진 듯 기뻤다. 그래서 매일매일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참 열심히 읽었다. 그 많은 책들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한 권... 그 이름도 유명한 세계적인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유일한 소설책인 "즉흥시인"... 보통 국민학교 3학년 때인가 아이큐 측정검사를 하는데, 나는 그 결과 아이큐 134였다. 한 학년마다 대략 8개의 반이 있고 나머지 한 개 반은 약간 장애 있는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우리 반 아이큐 꼴찌는 지우개를 잘 먹던 아이였는데 63이었고, 그 장애반을 오가던 한 친구는 그보다 높은 67이었다. 내가 그렇게나 많이 책을 읽어대서인지 몰라도 3학년 때부터 매년 독서왕이 되곤 했다. 학교에서 나눠주는 독서일지에다가 본인이 읽은 도서명/작가명/읽은 쪽수 등을 기입해서 제출하면 선생님께서 확인하시고 도장도 찍어주시고 칭찬도 많이 해 주셨다. 그게 재미있어서 집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다 써서 냈는데, 이제는 중복되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 뒤로는 학교 도서관을 매일 방과 후에 무조건 방문하게 되었다. 읽든 안 읽든 일단 독서일지에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 싶었나 보다. 그러다 보니 읽고도 쓰고 안 읽고도 쓰고 독서일지는 어느새 가득가득 차 있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 반에서 아니 우리 학년에서 아니 전교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학생으로 변하고야 말았다. 국민학교 6년 다니는 내내 공식적 비공식적 27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믿거나 말거나. 솔직히 전부 다 읽지는 못했을지라도 최소 절반 이상만 읽었어도 대단한 숫자다. 하루에 도대체 몇 권을 읽은 건지... 그러니 자연 학교 다녀와서 공부를 집에서나 학원에서 별도로 하지 않아도 웬만큼 잘했던 거 같다. 어차피 책에 있는 게 전부인 세상이었으니. 1학년 때는 딱 한번 올백을 받을 뻔한 적도 있다. 전 과목 중 유일하게 음악 한 문제를 틀렸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과목들은 책만 보면 다 해결되는데, 아무래도 예체능 쪽은 쉽지 않았던 듯. 어쨌든 학교에서 학급에서 공부를 잘하는 걸로 알아줄만했다. 6학년 담임 구 O회 선생님은 흔하디 흔한 속물이었다. 공부를 잘 하건 행실이 착하건 상관없이 오직 집안이 괜찮은 소위 먹고살 만한 집안 출신의 아이들만 편애하였다. 나 같이 못 사는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천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국민학교 6년 전체를 단시간에 훑다 보니 문제의 5학년 담임선생님의 얘기를 꺼낼만한 시간도 지면도 여유가 없다. 다음 편에서 차차 써 내려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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