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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특급썰렁이 Aug 15. 2024

나의 일생 3

내가 어렸을 적에는...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제각각의 우리 각자의 어린 시절은 누구나 다 같고 있는 그런 흔하디 흔한 얘기들만 있는 건 아니다. 서 얘기한 위생회사에서 똥 묻은 돈이나 줍던 그 시절 나와 내 친구였지만,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열심히 치열하게 놀고 또 놀았다. 뭐 그때는 비단 부도로 폭삭 망한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다른 집들도 그다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된다. 경상북도 경주시... 도시 전체가 국립공원 즉 흡사 한 권의 국사책과도 같은 동네이다 보니, 솔직히 관광산업 말고는 무언가 일자리가 될 만한 마땅한 구조가 아니었었다. 경주에서 유일한 기업이나 공장이라고는 고작해야 총알 생산하는 방위산업체 중 하나였던 풍 o금속이라는 공장 단 하나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 주변의 친구들 역시 과연 그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기억으로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의 내 모든 친구들 중에서 그나마 쫌 괜찮게 사는 사람은 딱 둘이었던 걸로 보인다. 한 명은 근처 동 o대 교수님이 아버지였고(나중에 알고 보니, 부의 상징이라는 늦둥이 동생까지 낳았던 집이다.), 다른 한 명은 정확하게 업종은 알 수 없었으나 중소기업 사장님을 아버지로 둔 친구였다. 그 이외에는 죄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분들 아니면 관광지 주변에서 장사하는 분들 혹은 시내 가게들에서 사업하는 분들이었으리라. 어쨌든 우리 집만 못 산 건 아니었던 거 같다. 다들 참 못 살던 시절이었다. 이쯤에서 잘 사는 내 친구 중 하나였다던 "중소기업 사장님을 아버지로 둔 친구"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하나 풀까 한다.

    

그 친구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1985년 국민학교 2학년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참 착하고 순수한 친구 진 o욱이라는 친구였는데(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그 친구의 동갑내기 사촌형인 진 o율이라는 친구집도 잘 살았다.), 그 친구와 그런대로 사이가 좋은 편이어서 그런지 일찌감치 초대를 받았었던 거 같다. 못 사는 형편에 아마도 집에 있던(그때는 마침 어머니가 쪼그만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계셨으니) 과자라도 선물 대신 들고 갔었나 모르겠다. 혹시나 늦을세라 제일 먼저 그 친구 집에 도착했는데, 그 집은 다른 여느 친구들의 집과 달리 매우 단정하고 깔끔한 이층 양옥집이었다. 소위 담장에 진 병조각 혹은 철사 꼬챙이 꽤나 꽂아놓을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인 그런 부잣집 그 자체였다. 특히 그 당시에는 경주시 전체에 관광지 특유의 고도 제한이란 것이 있어서, 강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2층집이 아닌 단층집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그 친구집은 넓고 큰 데다가 무려 2층의 반듯한 집이었다. 텔레비전에서나 볼 법한 잘생기고 온화한 느낌의 아버지, 누가 봐도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얼굴의 어머니, 심지어 상냥하고 예쁜 모습의 이모까지... 그야말로 부잣집의 모든 조건들을 두루 갖춘 그 부잣집 아들 그 자체였다. 나는 도대체 이번 생에서 이런 부잣집에 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문화적 차이가 극심하기 그지없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아주 극소수의 친구들만이 선택받았다. 우리 반 친구들 중에서도 특히 집이 잘 살거나 하는 친구들이 왔었다. 그중에 내가 끼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 아닌가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집이 잘 살기는커녕 못 사는 축에 속한 집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나마 내가 다른 친구들을 안 괴롭히고 착한 아이라는 평판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모든 걸 다 가진 그 집 아들보다도 내가 그것도 지지리 못 사는 집 아들인 내가 조금 더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구네 집 너른 거실에는 아주 큰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있었고, 거기에는 모두가 보란 듯이 3단 초콜릿케이크가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게 가장 크게 보였다. 케이크 외에도 여러 가지 과자와 과일 등등 먹을만한 것들이 그득그득하였지만, 내 눈에는 오로지 그 케이크밖에 안 보였던 거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상시에 케이크를 먹는다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따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1985년 내 나이 9살 그 나이 때까지만 해도 생일날 케이크를 먹었던 기억이 전혀 없는 거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들은 당연히 그럴 리가 없고 그나마 귀하디 귀한 막내아들인 나의 생일날조차 그런 비싼 생일케이크를 먹은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도 이미 1만 원에 가까운 케이크라는 것은, 말 그대로 정말 정말 특별한 날에만 한번 먹을까 말까 한 그런 특별음식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음식이었으니까... 어쨌든 난생처음으로 맛본 케이크 한 조각에 나의 이성과 양심은 온전히 녹아 없어져버리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한 조각을 먹어치우고 나니 신기하게도 더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친구 어머니께서 상냥하게 더 먹겠냐고 권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쑥기가 전혀 없어서 제대로 얼굴도 못 들 정도로 세상 얌전하고 내성적이었던 내가 그날 부끄러워서 친구 가족들에게 인사조차 잘 못하고 쭈뻣쭈뻣 하고 있다가... 갑자기 케이크를 먹기 시작하더니만 허겁지겁 누가 뺏을까 봐 쫓기듯이 게걸스레 먹어치우는 그 모습이 내심 안쓰러우셨을지도... 아님 아들 친구 녀석이 맛깔나게 열심히 먹는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하셨던 건지... 왜냐하면 나 이외의 다른 친구들은 그 귀한 케이크를 평상시에 많이 먹어봤는지, 케이크 한 조각을 마저 먹지도 않고 이내 다른 과자들이랑 음식들에 손이 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만 여전히 그 케이크 하나에만 꽂혀서 그다음 조각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이니... 작지 않은 케이크 접시에 든 케이크 한 조각만으로도 그동안 내 평생 살아오면서 꿈꿔왔던 한 개의 완전한 케이크 크기와 맞먹는 크기인 듯 느껴졌다. 그렇게 그렇게 한 조각씩 한 조각씩 적어도 3조각은 족히 먹어치운 모양이다. 다른 부잣집 종류의 아이들은 이미 간단한 다과를 마친 뒤에 신기하고 신기한 만화영화 비디오 시청을 하러 VTR마저 설치되어 있는, 친구의 크고 좋은 방으로 옮겨갔고... 나는 여전히 거실에 남아 불쌍한 듯 배고픈 듯 모양 빠지게 케이크에 잔뜩 몰입을 한참 동안이나 지속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결국 결국 배탈이 나고야 말았다. 한 끼 식사에 쌀보리밥 6그릇을 먹어도 배가 안 찰 정도로 식성이 좋던 나에게도, 그 나이가 되도록 제대로 한번 먹어보지 못한 케이크라는 신문물은 단번에 소화하기에는 꽤 벅찼나 보다. 급기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화제라는 것을 먹어야만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아직도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시면서 소화제를 권해 주시던 친구 어머니의 얼굴 표정이 눈에 선히 떠오르는 듯하다. "아, 이 아이 집이 가난하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까지 못 먹고 지내는 건가"라는 마음의 소리가 지금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부터 나는 빵이라고 하면 특히 케이크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아니 이른 새벽 눈을 뜨더라도 절대 거부함 없이 언제 어디서든 먹어치울 수 있는 진정한 빵돌이로 거듭난 거 같다... 눈물 젖은 빵 아니 눈물 젖은 케이크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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