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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특급썰렁이 Aug 16. 2024

나의 일생 5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1)

그 5학년 선생님의 이름은 박현 O 선생님이다. 굳이 성함이라고도 붙이기 싫을 정도. 왜 이 선생님을 생각하니 "더 글O리"가 생각나는 걸까. 내게는 그 시리즈보다도 더 잔혹한 기억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해인가. 인생을 한참을 살아온 나에게 정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하신 분들이 있다. 그것도 간호업 쪽 종사자 이른바 의료직에 계셨던 분이 하시는 얘기니까 더욱더 신빙성 있게 들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진짜 정신이상이 있나 보다. 그럼 어떡해야만 하나요.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봐야 할까요. 그리하여 그  의료종사자 출신분이 추천하는 용한 정신과 의원을 방문하기로 한다. 오늘로부터 거의 14년 전이니까... 2010년 01~03월경으로 기억된다. 추운 날씨만큼이나 경직되어 있는 내 마음을 부여잡고 무작정 그 의원을 찾아 나섰다. 부산의 이름 길기로 유명한 지하철역 근처에 소방서 옆 건물이었던가.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마치 교도소 입구처럼 좁디좁은 창구 앞에 앉은 간호사가 용건을 묻더니 의사에게로 데리고 갔다. 50대가량의 나이 지긋하고 머리도 많이 벗겨진 중년의 의사가 책들로 가득 찬 서재 앞에 앉아있더라. 대뜸 어떻게 왔냐고 묻더라. 처음에는 무슨 화두로 얘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하였는지는 솔직히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니 45년 가까이 된 세 살 적 추억도 소환되는 내 기억력에서 지워졌다면 둘 중 하나다. 기억하기가 진정 진저리 나게 싫거나 아니면 기억할 수준의 임팩트가 없던가. 어쨌든 내 소개부터 시작했던 거 같다. 마치 나의 이 "나의 일생 시리즈"처럼, 내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삶 뭐 이런 거...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이, 내 일생을 읊어 나가면서 중간중간 그 의사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이러기를 여러 차례 주고받다가 보니 어느새 갑자기 그 문제의 5학년 시절에서 딱 멈춰 서게 되었다. 이거 뭐 응O하라 1988도 아니고... 온 대한민국 땅이 일 년 내내 떠들썩했던 1988년 서울올림픽 바로 그 해였다.

   

앞서 기술하였듯이 1~4학년 내내 다소 그로테스크한 담임선생님들로부터 고통받았던(유일한 처녀 선생님은 이내 시집가셔서 담임이 중도교체되는 불상사까지) 나로서는 5학년 담임선생님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는지도 모른다. 아니 기대 반 포기 반이었을 수도. 하긴 그 당시에 담임선생님이 좋다고 해서 학교 생활이 무조건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무튼 처음으로 마주한 5학년 담임선생님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대략 20대 말~30대 초반의 세련되고 약간 예쁘장한 신식 선생님. 친구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을 정도로 뭔가 5학년 1년이라는 기간을 기대하게 만드는 첫인상이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기선제압을 하려고 하셨는지 얼굴에 비해 다소 말투가 억세고 강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국민학교 5학년의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닌 듯 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4학년 때까지 줄곧 모범생의 이미지를 가져왔던 나. 그 당시에는 1년에 한 번인가 아님 1학기에 1번씩인가 "선행상" 뭐 이런 상을 주는 관례가 있었다. 선생님이 어느 날 문득 조회시간 혹은 종례시간에 아이들에게 투표용지 같은 걸 건네주면서 인기투표 비스름한 것을 하곤 하셨다. 제일 먼저 우리 주변의 착한 학생을 추천하라고 하셨다. 눈치도 양심도 없는 몇몇 학생들은 자신 스스로를 셀프 추천하기도 하였다. 그런 비양심들을 위하여 민주주의는 "동의"와 "제청"을 만들었다. 동의가 되지 않는 비양심 후보들 일부를 제외하고는, 나와 함께 보통 한두 명의 극소수만이 선행상 후보로 추천되곤 하였다. 나는 그만큼 경쟁력이 있는 학생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친구들을 괴롭히기는커녕 말도 제대로 섞지 않을 정도로 극 내성적인 아이였으니까. 어느 정도인가 하면... 어느 날 종례시간에 내 친구들의 대화를 우연찮게 듣게 되었다. 내 옆짝으로 오랫동안 있었던 아이가 다른 친구에게 말하기를, "나 오늘 하루종일 쟤(그게 나다) 목소리 한번 못 들어봤다." 다른 친구 왈, "나도"... 행상의 조건은, 길을 걸어가다가 허리굽은 꼬부랑 할머니를 부축해 드리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땅에 떨어진 지폐 뭉치를 주워서 경찰서에 갖다 드리는 것도 아니고... 수상쩍은 행색의 간첩이나 공비를 신고하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친구들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했다. 그 선행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선을 행하되 악을 행해서는 안된다. 선을 행하지 못할 바에는 아예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것이 진정한 선행이요 악행의 반대말이다. 한 반에 50여 명이 넘는 아이들 중에서 워낙 남초가 심하던 시기라 과반수를 넘는 남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나를 지지하였다. 웬 용기 있는 여자 아이 하나가 나를 추천하자, 친구들은 이내 그 여자애가 나를 좋아한다고 놀러 댔지만 그러다가 동의와 제청 한방에 나는 어느새 유력한 선행상 후보로 둔갑해 있었다. 그녀의 용기가 나를 무대 위로 오르게 한 것이다. 암튼 어렵지 않게 후보가 되기만 하자, 여론몰이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왜 나를 추천하였는지 그 이유를 말해보라고 하시자, 숨겨있던 나에 대한 미담이 봇물같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쟤는 수업시간에 딴짓하지 않아요. 는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가서 놀지 않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어요. 여자애들이 줄넘기놀이할 때, 다른 남학생들은 이내 줄을 끊고 도망가는데 쟤는 그러지 않고 옆에서 줄을 잘 잡아줘요. 미담이라는 얘기들이 죄다 그런 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더 유력한 선행상 후보였다. 왜냐하면 나 이외에 다른 남학생들은 모조리 정말 모조리 다들 개구쟁이였고 단 한 시라도 여학생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그 누가 부러울까 할 수준의 개구쟁이였지만, 나는 감히 여학생들을 괴롭힐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아주 손쉽게 공개투표로 만장일치 선행 어린이가 되었다. 그런 선행 어린이인 나의 이미지에다 약간의 공부실력이 합쳐지면서 나는 알게 모르게 주변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드디어 5학년에 올라와 새로이 편성된 학급에서는 그 인기와 선행어린이에 대한 기대감이 반장 후보라는 또 다른 꿈의 열망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선행상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의의에 입각한 반장 선거가 후보 추천으로 막이 올랐다. 어느 아이의 추천과 또 다른 어느 아이의 동의 그리고 제청이 나를 반장 후보 목록에 올려놓았다. 이제는 쟤도 반장 할 때가 되었다는 것. 나는 두렵기도 하고 또 떨리기도 했다. 나는 무대 공포증, 대중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기에 연단에 올라서 자신 있게 연설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대중의 이 전폭적인 지지를 묵살하고야 말 수는 없었다. 반 친구들이 아닌 먼산을 비스듬히 쳐다보면서 몇 마디 꺼냈다. 나를 반장으로 뽑아 주시면 열심히 하겠다 그 정도... 그조차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끝말을 얼버무리면서 마무리했지만, 이미 친구들의 마음에서는 내가 반장이었던 듯싶다. 그렇게 압도적으로 표를 얻으면서 쟁쟁한 다른 반장 후보들을 제치고 남자 반장이 되었다. 여자 반장은 그야말로 반듯한 세탁소집 딸내미 방 O희가 되었다.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서글한 그 여자 아이는 원래부터 유력한 여자 반장 후보였다. 단 한 가지 단점이라고는, 당시 유행하던 "천방지축 마골피" 즉 이른바 상놈의 성씨 중의 하나인 방 씨라는 점...    


남자 반장이 된 것은 우리 가족에게 그렇게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반장이 된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돈이 드는 것이었으니까. 그때는 왜들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반장은 일 년에 두 번 있는 소풍 때에는 담임선생님 도시락을 사 와야 했고. 그냥 집에서 엄마가 싸 오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괜찮은 김밥가게에 주문제작해야 했고. 운동회 때에는 거하게 스폰서를, 스승의 날에는 쓸만한 선물을 하는 등등 이래저래 재력이 받춰져야만 했다. 그냥 반장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잘 나서 내가 친구들한테 인기가 있어서 내가 공부를 잘해서 내가 착해서 반장이 된 건데... 선생님들을 챙기고 학교의 각종 행사들을 챙기고 하는 몫은 온전히 어른들의 아니 반장 아버지나 어머니의 몫이었던 가 보다. 그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저 국민학교 6년 즉 12학기 중에서 반장이 딱 한번 되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반장이 된다는 것이, 우리 가정에 그리고 나아가서 나의 인생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여태껏 그 파문이 남겨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나도 어렸지만 내 반장 인생도 참 어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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