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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특급썰렁이 Aug 16. 2024

나의 일생 6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2)

남자 반장이 되었는데, 담임 선생님의 반응이 약간 이상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듯도 했다. 그 당시 나는 누가 봐도 못 사는 집 아들 그 자체였다. 위로 둘이나 되는 누나들로부터 물려받은 여자옷을 입고 학교에 간 적이 부지기수였다. 하루는 빨간색 알록달록 체크무늬 마이였는데 일반 남자옷처럼 왼쪽이 위 오른쪽이 아래의 구조가 아니라, 오른쪽이 위 왼쪽이 아래의 전형적인 여자옷이었다. 그 시절 친구들이 놀려대는 포인트는 주로 두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이름이 촌스러워야 한다. 내 절친 한 명은 이름이 정지 O이었는데, 그래서 별명은 주야장천 "정구지"였다. 이 정구지의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랑 친구분이셨고 정구지 어머니랑 우리 어머니 두 분 다 빙 O레 우유 아니 요구르트 배달 아줌마이셨던 거 같다. 정구지 집에 몇 번 놀러 간 적이 있는데, 뭐 먹을 거 없나 하여 냉장고를 열어봤더니 냉장고 속은 문까지 온통 요구르트랑 우유가 잔뜩 채워져 있었다. 이 녀석 집안도 우리 집이랑 별로 다를 바 없는 가난인데 어찌 귀한 우유랑 요구르트가. 알고 보니 정구지 어머니가 미처 그날 판매하지 못한 재고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집에 들고 와 반강제로 소비하고 있었던 것. 정구지 어머니는 그거 그만두시고 나중에 시장에서 순댓집도 하셨다. 아니면 아까 그 여자반장처럼 성이 방 씨라서 방구쟁이, 뭐 이런 식. 예쁘장하니 멀쩡하게 생긴 여학생 별명치고는 상당히 극악한 수준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달달하고 사랑스러운 별명을 붙여준다면 주변에서 둘이 사귄다고 놀림받기 십상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치하기가 그지없었지만 가장 손쉽게 가장 효과적으로 타격감 있게 놀릴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둘째, 외모가 중요했다. 간혹 얼굴이나 피부가 유달리 까무잡잡하거나 어두운 톤의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튀기, 혼혈, 잡종, 깜둥이, 쌔깜동이, 인도카레..." 온갖 상스러운 별명들이 따라왔다. 못생겨도 문제였고 잘생겨도 문제였다. 그저 그런 평범한 외모가 필요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더 크거나 더 작거나 더 마르거나 더 뚱뚱하지 않아야 했다. 그저 평범한 마네킹 같아야만 했던 것이다. 셋째, 못 살아야 했다. 그냥 못 사는 게 아니라, 그 못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특출 나게 못 사는 티가 나야 했다. 남들이 티티 O스 크레파스를 가져올 때 나는 못 가져올 정도. 남들이 한 장에 100원짜리 마분지, 한 장에 50원짜리 도화지, 한 장에 30원 하는 모조지를 살 때 나는 한 장에 10원 갱지 이른바 똥종이를 가져와야 다들 내가 못 사는 줄 알았다.

   

직감적으로, 담임 선생님은 내가 못 사는 집 아이라는 것을 알아채신 듯했다. 반장 선거 결과 내가 남자 반장이 되었다는 얘기는 하셨지만, 으레 그러하듯 반장 당선자가 연단에 다시 올라 당선 소감을 발표하는 통과의례가 느닷없이 생략되었다. 쭈뻣쭈뻣 부끄러워하며 연단으로 나가려던 나를 선생님이 제지하신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연한 것으로 예상됐던 당선에 우쭐해져 나오려던 나를 무시한 건지도. 너 따위가 무슨 반장을. 는 얼굴이 확 달아오를 정도로 당황하고 민망했지만, 어린 11살의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안 하시면 안 하시는 거니까. 아무나 할 수 없는 반장 당선도 그것도 1학기에 단 한 번뿐인 반장 당선도. 아 맞다, 선생님이 올해에는 반장을 달랑 1학기만 하는 게 아니라 1년 동안 쭈우욱 이어서 한다고 하셨었는데... 어쩌면 내 인생에 단 한 번밖에 없었을 그 당선의 순간도. 실제로 그것이 나에게는 국민학교 6년 동안에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반장의 경험이었음을. 그저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닌 듯이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당선되었다는 감흥이 기쁨이 환희가 감격이 자랑스러움이 일순간에 사라진 순간이었다. 그것이 내가 1988년도 5학년 한 해 동안 내내 겪어야만 했던 그 반장으로서의 힘겹고 고단한 중압감의 삶의 시작이었음을. 반장 선거 직후에 느닷없이 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시작되었다. 다른 여느 학생들보다도 우선적으로 학급 반장, 부반장들의 집부터 방문하겠다고 하셨다. 남자 반장, 여자 반장, 남자 부반장, 여자 부반장 이렇게 단 네 명만이 우선 방문대상이었다. 맨 처음 나의 일생을 기록했을 때에 언급되었던 경주에 내려와서 처음으로 우리 다섯 식구의 생계에 일조하였던 그 구멍가게는 하루하루 달팽이 같은 느리고 더딘 성장을 거듭한 끝에 쬐그마한 "태 O 슈퍼마켓"이라는 이름도 거창한 동네 슈퍼로 탄생하게 되었다. 하고 많은 이름 중에서 굳이 "태 O"이라는 이름을 선택하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이미 오래전부터 쓰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는지 모르겠으나 암튼 슈퍼는 슈퍼였다. 동네 친구들한테 그렇게나 인기 있다는 그 많은 OO집 아들 중에서도 탑 쓰리 안에 든다는 그 슈퍼마켓집 아들이었다. 아무래도 일반 가정집보다는 그런 가게들이 가정방문하기에는 의외로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었다. 특히 그 당시 몇몇 선생님들은 노골적으로 굳이 굳이 가정집이 아닌 가게로 방문하곤 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퇴근하셔서 집에 계실 때 방문해도 될 것을 왜 굳이 퇴근하시기 전에 일하시는 현장인 가게나 사업장 쪽으로 방문하려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가정방문이 목적이 아닌 다른 가정방문이었기 때문이다. 친구의 순댓집에 방문해서는 못 이기는 척 순대를 공짜로 얻어오고 식당에 들러서는 은근슬쩍 공짜밥이나 얻어먹고 심지어는 옷 가게에서 옷을 몇 번 걸쳐보고는 옷을 선물 받아 가시는 선생님도 있었다. 뭐 대놓고 아침 등교 시에 촌지를 챙겨가기도 했던 시절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선생님을 못 챙기는 우리 집 형편이 불쌍하기도 했다.  그 어려운 시절에도 아침마다 비싼 500원짜리 캔커피를 한 개씩 사다가 담임선생님 교탁에 올려놓던 학생도 있었다. 소풍 때마다 1만 원이나 되는 고급 김밥도시락을 주문하고 소풍 내내 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소요되는 제반 경비들을 모두 다 대신 지불하는 돈 냄새나는 귀부인 어머니도 많았다. 나의 아버지는 나의 어머니는 절대 그러실 수가 없는 가난한 부모님이었다.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급급한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그들에게는 무슨 상상조차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 그 문제의 담임선생님이 학급 대표들의 가정방문 일정 중에서 우리 집에 제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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