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생 7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3) 그 완결 편
선생님은... 예상했던 대로, 선생님은 우리 집 그 가정집이 아니라 어머니의 소위 사업장인 슈퍼마켓으로 방문하였다. 애당초 못 사는 우리 집 따위는 올 생각조차 없었으리라. 다들 기억하는 대로, 이상하리만큼 국민학교 시절에는 이른바 그 호구조사 아니 "가정실태조사"라는 것이 아주 참 많았다. 국민학교에서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그게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는데, 매년 학년초만 되면 어김없이 그 가정실태조사를 했다. 우선은 갱지에다가 빈칸을 잔뜩 만들어 놓고서는 본 적, 호주, 세대주, 아버지 성함, 어머니 성함, 한자 이름, 영문 이름, 아버지 직업, 어머니 직업, 아버지 최종학력, 어머니 최종학력, 집에 텔레비전/냉장고/세탁기가 있는지 없는지 여부... 심지어 재산정도, 아버지 월급까지 적었던 거 같다. 어떤 때는 학교에서 근무하시는 친척이나 아는 사람이 있는지 적은 적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내 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같은 학교 선생님이셔서 괜히 아는 척 기록한 기억도 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선생님/교수인 집의 아들이나 딸은 모 아니면 도였다. 아빠 엄마 닮아서 무지 공부를 잘하는 엘리트급 모범생이든지 아니면 도대체 누굴 닮았는지 도무지 공부하고는 담을 쌓은 문제아 내지 불량아였기 때문이다. 사실 학생 본인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만 잘하면 되지, 그 학생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얼마나 돈을 잘 버는지, 그 학생의 집에 뭐가 있는지가 뭣이 중한가. 이렇게 기본적으로 가정실태조사가 끝나면 선생님들의 타깃은 자연스레 좁혀지고 쏠려지게 마련이었다. 한 반에 적어도 50명이 넘는 최대 56명에 가까운 집들을 하루에 한 집만 방문하더라도 무려 2개월 가까이가 걸리는 가정 방문에 제대로 된 시간과 공을 들일 선생님은 그리 많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 그중에서 정말 꼭 가보아야 만 하는 상위 몇몇 학생 가정들을 별도로 분류해 놓고서는, 그날 방문할 수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목록에 올린다. 하루에 보통 대여섯 명을 정해 놓고 방과 직후부터 즉시 가정 방문을 시작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가정 방문을 하는 집은 단 하나 아니면 단 두 곳뿐이었다. 그런 부잣집 혹은 공무원/직장인 가정에서는 여유롭게 다과를 즐기면서 최소 30분~2시간가량 시간을 온통 다 허비하고는... 나머지 가겟집/막노동꾼/일일근로노동자/맞벌이 가정에선 그냥 아버지 또는 어머니 얼굴인사 정도만 하고 마는 것이다. "뭐 일 년간 당신네 아들과 딸을 내가 가르치겠으니 뭐 조그마한 성의표시라도 하면 내 크게 네 자녀들을 배려해 주리다"라는 식의 너그러운 아량을 보여줬다고나 할까.
선생님이 그런 우리 집에 가정 방문을 온 것이다. 그것도 그 해 그 학급에서 가정 방문 첫날 가장 첫 번째 집으로 온 것이다. 슈퍼마켓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이미 선생님의 눈은 매장 내부를 빠르게 스캔하는 것 같았다. 매장 크기, 손님이 얼마나 많은지 등등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뭐가 그리 도도한지 허리 한번 숙이지 않고 선생님은 어머니와 마주 했다. 가게 단칸방 안에서 어머니와 선생님이 말씀을 나누기 시작하시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조용히 슈퍼마켓 밖으로 나와 가정 방문이 무사히 잘 끝나겠거니 하는 생각에 잠시 잠겨 있었다. 그런데 두 분의 대화가 시작된 지 채 십 분이나 되었을까. 느닷없이 가게 안쪽에서 큰소리가 나면서 선생님이 슈퍼마켓 밖으로 쑥 나오시는 게 아닌가. 그것도 어머니를 향해서 씩씩거리면서... "어머니, 그러시는 거 아닙니다. 반장 어머니가 새마을 어머니회에 안 나오겠다고 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래 가지고 어떻게 아들 키우고 공부시킨다고 하겠어요, 예?" 선생님이 성내면서 던져내던 그 한 마디가 오랜 세월에 묻혀서 하나하나 또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법 긴 시간 동안 기분 더럽게 나쁘다는 식의 노골적이고 불쾌한 워딩을 계속하면서... 화가 많이 났는지 신발만 겨겨우 신고 선생님은 도망치듯 우리 집을 아니 우리 가게를 떠나갔다. 통상 가정방문 시에는 그 반 남자 반장과 여자 반장이 선생님을 수행비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관례적이었기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선생님을 따라나서려 하였다. 하지만 하지만 그 선생님은 강하게 손사래를 치면서 내가 따라오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첫 번째 거절을 당했다. 선생님으로부터. 왜인고 하니, 예측했다시피 선생님은 어머니에게 새마을 어머니회에 참석할 것을 권고 아니 강요하셨다. 어머니회 참석은 단지 출석의 문제가 아니라 돈에 관한 문제였다. 어머니는 순진하게 참석이야 할 수 있으니 한 달에 한 번쯤은 다른 사람한테 가게를 맡기고서라도 꼭 갈 수 있도록 해 보겠다고 하셨단다. 그런데 선생님은 출석 말고 기부금 혹은 찬조금조의 새마을 어머니회 회비를 언급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다섯 식구 사이좋게 나눠먹고 죽을 돈도 모자란 판국에... 우리 처지에 무슨 놈의 회비는 회비. 거기서부터 탈이 나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언성이 급작스레 높아진 것도 이때인가 보다. 거기에 꽂힌 선생님이 설득한답시고 몇 마디 덧붙인 말씀이 더 화근이 되었다. 한 번에 큰돈으로 회비를 내시지 못할 거 같으면, 몇 차례 할부처럼 나눠서 돈을 기부하시거나 아니면 학교 각종 행사 때마다 알맞게 찬조하면 된다고. 그에 대한 어머니의 대답은. 위에 두 딸도 그런 거 한번 없이 반장도 하고 여태 학교 잘 다니고 있는데, 공부도 잘하고 착해서 반장까지 된 우리 아들이 뭐가 못 나서 굳이 돈까지 내 가면서 공부시켜야 되냐고. 그럴 필요 전혀 없으니 다른 사람 어머니회 임원 시키라고까지... 선생님은 완전히 꼭지 돌고 기분 상해 버린 거 같다. 선생님 성격도 보통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설마. 그런 일 있다고 해서 나한테까지 어떤 영향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젊고 예쁜 그 박현 O 선생님이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그다음 날 아침 학급 조회 시간에 남자 반장인 내가 선생님께 차렷 경례를 하려고 하자, 선생님은 손을 크게 휘저으며 "우리 반은 올 한 해 동안 담임선생님께 차렷 경례하지 마라"라고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셨다. 나는 당황했다. "선생님께 차렷 경례"는 여자 반장도 감히 하지 못하는 남자 반장만의 오롯한 최강 권리이자 권력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였기 때문이다. 그 맛에 반장 하겠다는 친구들도 일부 있었을 정도. 남들은 매년 하는 그 반장을 평생에 한 번도 못 해봐서 몸살 나는 학생들도 곧잘 있을 만큼 절대적인 이미지였는데. 그걸 못하게 하시다니. 독수리가 날개를 얻자마자 채 날아보기도 전에 누군가가 한쪽 날개를 댕강 부러뜨린 듯한 기분이었다. 슬펐지만 5학년 남자 반장에 불과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날 아침부터 6학년이 되어 학급이 바뀔 때까지 선생님은 나만 보면 없던 인상까지 다 동원하여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최대한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따금 내 목소리 따위는 아예 무시한 적도 많았다. 심지어는 급기야 멀쩡한 남자 반장인 나를 유리인간처럼 완전히 배제한 채, 대놓고 남자 부반장에게 자습을 시키게 하거나 반장 노릇을 하게 하는 등 부적절하고 그릇된 처신이 다반사였다. 나는 그렇게 1988년 한 해 동안 철저하게 무시받았고 배척당했고 거절당했고 거부당했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단지 못 사는 집 아들 주제에 언감생심 학급 반장이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12살의 그렇고 어리고도 어린 그 나이에 사회로부터 특히 하나의 거대한 공권력으로부터 맞설 수 없는 윗사람으로부터 조직으로부터 온전하게 버려지고 무참히 짓밟혔다. 누군가는 그게 무슨 대수인가. 별일도 아닌 것 같고 별 얘기를 다한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지극히 상대적으로 개인적인 해프닝쯤으로 치부될 만 큰 사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로부터 21년도 훨씬 더 된 어느 날 정신과 의사의 힘을 빌어 나의 무의식 저 밑바닥에 겨겨우 가라앉아 있었던 씁쓸한 트라우마의 찌꺼기가 다시금 21년 만에 악의 화신처럼 무저갱의 악마처럼 결계에 수천 년간 갇혀 있다가 다시 깨어난 악령처럼 환생하게 된 것이다. 2010년의 그날 그 정신과에서의 하루 그날부터 이렇게 힘겹게 그 얘기들을 끄집어내어 글로 기록하고 있는 오늘까지도 그 트라우마는 내내 내 인생을 휘감고 있는 저주스러운 나쁜 기억이다. 어린 시절 나쁜 기억이 이렇게도 무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