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생 37
나는 한때 신문배달소년이었었다... (5)
그 다음날이 되었다. 어제 그 가게에 배달을 해야하는 차례가 되었다. 사실 그 가게에 다시 맞닥뜨린다는 것은 죽기보다도 더 싫었다. 소스라치게 싫었다. 하지만 그 계단을 다시금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가게 대청소를 하고 있었는가 보다. 얼핏 계단 아래쪽에서 보니까 가게 문이 활짝 열려있고 안쪽에서는 요란하게 바닥 물청소를 하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게 주인이 신나는 대중가요 메들리 테이프를 지구가 떠나갈새라 한껏 볼륨을 올려놓고 청소하면서 손님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눈 눈치였다. 아뿔싸... 분명 "주인 몰래" 문 앞에다 놔두고 오라고 그랬는데... 굳이 총무님이 그렇게 자세하게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나 역시 진짜 아무도 모르게 신문만 놔두려고 계획했었던 게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청소를 하고 있다니... 더이상 뒤로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선뜻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외나무다리에 선 듯한 느낌이 몰려왔다. 두려웠지만 오늘 여기 배달을 못 하고 돌아가기라도 할라치면, 그놈의 총무님이 나를 가만 두지 않으리라. 아마도 얼굴 한 가득 세상 모든 근심을 혼자 짊어진 듯 경직된 모습으로 나는 계단을 한 발짝 한 발짝 오르고 있었으리라. 다만 혹여나 가게 주인이 내 발자국 소리를 들을세라 도둑고양이만치 나는 숨죽여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었다. 절대 들키면 안 되는데... 어느덧 가게 입구 바로 아랫계단. 딱 세 칸이 남았다. 하지만 차마 그 세 칸을 마저 다 오를 용기는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소리죽여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계단에 최대한 수그리고 앉아서 팔을 있는 힘껏 뻗어냈다. 그리고는 잽싸게 신문을 입구 근처에다가 휙 던지고는 방향을 틀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그 순간부터는 줄행랑이었다. "단번에 세네 계단씩 몇 걸음이면 1층에 도달하겠지" 하며 뒤돌아 계단 아래로 내닫기 시작하자마자 와라락 등줄기가 차다못해 추워지도록 싸해졌다. 가게 주인이 바닥청소하면서 밀대걸레 빨던 그 더러운 물이 담긴 세숫대야 통째로... 부산하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내게 그만 뿌려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뒤이어지는 가게 주인의 외침은 내 발걸음을 얼어붙게 할 만큼 날카롭고 표독스러웠다. 야 이 새끼. 다시는 신문 넣지 말라니까. 너 잡히면 죽을 줄 알아! 까딱하다가는 신문배달하다가 이 짧은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게 나는 1층에 도착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아니 거의 들고 뛰다시피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고는 그 가게에서 한 500미터는 족히 떨어진, 그 가게 한 귀퉁이조차도 일절 보이지 않는 멀리까지 자전거로 내달렸다. 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가게 주인한테 붙잡히지 않았다는 안도의 한숨도 잠시, 놀라서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땀으로 범벅이 되버린 내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신문배달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람... 그 가게 주인에게는 내가 자기 말 안 듣는 쓸모없는 버러지 같은 신문배달소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층 더 서러워졌다. 뭐 남들보다 못 배우고 무식해서 내세울 만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삼남매 먹여살리고 공부 시키는 멀쩡한 아버지 어머니를 두고... 내가 왜 이런 괄시와 천대를 받아가며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걸까. 서글프고 한스러운 마음이 물밀듯 밀려만 왔다.
그 날 골목 한 구석에 혼자서 쪼그려 앉아 한참을 울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일으켜 신문배달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총무님에게 그 날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거참 제대로 배달하라니깐, 또 일 만들었네. 됐어, 내가 알아서 할께. 내일부터는 그 가게에 신문 넣지 마. 괜히 주인 성질만 건드려 놨네, 어이구. 총무님의 말 한 마디로, 그 가게에 대한 나의 임무는 드디어 끝을 맺었다. 적어도 앞으로는 물벼락 맞는 일 따위는 다시금 생기지 않을 거 같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씁쓸한 여운을 안은 채 집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왜 이리 늦게 집에 오냐고 다그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컥 했지만, 어디서 물벼락 맞고 옷을 다 배려 왔냐고 잔소리를 시작하시는 어머니의 등쌀에 눈물이 나오다가 쏙 들어갔다. 물벼락 맞고 가벼운 감기라도 들었는지 종종 마른 기침을 콜록대면서도 그 날밤은 간만에 두 다리 쭉 뻗고 푹 잘 수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