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생 39
나는 한때 신문배달소년이었었다... (7)
신문배달을 하게 되면서 아침에 뉴스를 유심히 보는 습관이 저절로 생겨났다. 특히 "오늘의 날씨" 코너가 나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헬멧은커녕 그 흔한 야구모자 하나 없이 맨몸에 보호구 같은 거도 안 한 채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었다. 자전거 탈 때에는 비단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헬멧은 잘 안 쓰고 다니긴 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화창하고 맑은 날씨에조차 상대적으로 교통사고 위험에 제법 노출되어 있었다. 하물며 비가 많이 오거나 짓눈깨비라도 흩날리기라도 한다치면 그야말로 자전거 타기에는 최악의 날씨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냥 자전거 타고 놀러다니는 게 아니라, 얼마 안 되는 물에도 홀랑 다 젖어버리기 십상인 종이신문을 안장 뒷쪽에 실고 다니는 것이 말해 무엇하랴. 분지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눈 구경하기는 힘든 경주 지방이었기에 눈이 와서 위험해질만한 염려일랑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대신 이제나 저제나 신문배달하는 그 오래지 않는 시간 동안에 비가 내리는 상황만큼은 정말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었었다. 어느 날이었었던가. 오늘 돌릴 신문 꾸러미들을 고이 챙겨 자전거를 타고 사무실을 나선 지 불과 몇 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꾸물꾸물 먹구름이 요기저기 띄엄띄엄 보이는 그 모양새가 영 마음에 깨림칙하더니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길했다. 부슬비라도 계속 되면 신문지들은 배달지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는 물에 젖은 찐빵 덩어리로 모두 변해버릴지도 모르니까. 잽싸게 미리 준비한 큰 비닐봉지를 신문지 위에다가 씌워 놓아 더이상 신문지가 젖는 것은 간신히 막아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잦아 들었다. 아. 이 정도면 무난하게 오늘 배달도 끝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웬걸 오늘은 결국 뭘 해도 안 되는 날이었었나. 그나마 한쪽 귀퉁이가 살짝 물에 젖은 신문지들을 후후 불어가며 배달은 계속되었고, 신호등 빨간 색 불빛을 보고서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던 그 순간이었다. 아니다 다를까 비에 살짝 젖은 핸들에서 손이 미끄러지면서 그만 자전거가 한쪽으로 확 하고 넘어가 버렸다. 허걱, 신문지들은 모조리 횡단보도 가장자리에 물 고여있던 자리로 와락 쏟아지면서 말 그대로 종이쓰레기 뭉치가 되었지 뭔가. 엎친 데 곱절로 덮친다고... 자전거가 넘어지는 그 시점에 핸들이 사정없이 반대로 꺾이면서 고장이 나고. 다시 신호등은 파란불로 바뀌고...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내가 거기서 허겁지겁 신문지를 줍는 모습에도 전혀 아랑곳 않고 각자 제갈길로 가느라 분주하기 그지 없었다. 가끔 흘끗 쳐다보고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딱히 잘못한 것도 없지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민망해지면서 부끄러움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아. 이대로는 도저히 배달을 이어나갈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마침내 다시금 지국 사무실로 돌아가서 젖은 신문지들 대신 새 신문지들을 받아가지고 배달을 재개해야만 했었다. 덕택에 배달시간도 1시간 이상 늦어져서 가는 곳마다 왜 이리 늦게 가져왔냐는 핀잔을 연거푸 들을 수밖에 없었다는 ㅠㅠㅠ
그러나 날씨와 연관된 또다른 느낌의 기억도 있었다. 아니 내게는 자못 아름다웠다고나 할까.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는데 삐쩍 마른 탓에 워낙에나 추위를 많이 타던 나는 매서운 바람에 몸도 마음도 잔뜩 움츠린 채로 지국 사무실을 나섰었다. 그날따라 인도로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일찌감치 자전거에서 내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력으로 자전거를 끌고 가고 있던 그 때였다. 아침부터 영하까지 떨어질만큼 제법 추운 날씨였던지라 인도 곳곳에 살얼음이 얼어 있었는데, 하필 미처 내가 보지 못했던 한구석의 얼음에 그만 미끄덩하고 나는 인도 바닥에 무참히 자빠지고야 말았다. 자전거 역시 나처럼 바닥에 쓰러지면서 금새 신문지들은 온 사방팔방으로 놔뒹구게 된 허탈한 상황... 나는 또 절망이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옆을 지나가던 어느 젊은 아가씨가 내게 다가왔다. 언뜻 보기에 한 2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이 아가씨는 너무도 걱정어린 표정과 함께... 내게 괜찮냐며 나를 앞뒤로 둘러보더니... 혹시 다친 데는 없냐는 얘기와 동시에 땅에 흐트려져 있는 신문지를 하나씩 주워나가기 시작했다. 고마웠다. 매번 신문배달하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거나 더 심하면 사람 취급도 안 하던 그런 못된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세상의 매정하고 쓰디쓴 맛만 봐 왔던 나로서는 어찌 보면 신기하다 할 만큼이나 의외였었기 때문에 더욱이 그랬는지도 모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습을 본 행인들 몇 분이서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 그 아가씨처럼 나를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지난번과 달리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신문지들은 금새 자전거 뒷 안장 제자리로 모아졌다. 아무렇지 않게 옆에서 가만히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또다른 고마운 대학생 형도 계셨다. 나는 넘어진 게 약간은 숨기고 싶도록 부끄러웠지만, 어찌나 고맙고 또 고맙기만 했던지... 연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 가며 수줍게나마 감사의 표시를 계속 했었다. 내가 자전거 핸들을 바로 잡고 신문지 추스리는 것을 마치자, 그 고마운 분들도 원래 각자가 가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1989년의 어느 겨울날의 아름다운 경험은 내게 결코 잊혀지지 않는, 온기어린 사람 냄새나는 추억으로 남아 눈앞에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