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생 40
나는 한때 신문배달소년이었었다... (8)
지국에는 무서운 총무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국장님, 총무님 말고도 "수금원 누나" 가 있었다. 나이는 아마도 20~30세 사이... 쉽게 특정하기 힘든 범위 내에 있었고 (솔직히 국민학교 남학생이 어른 여성의 나이대를 어림짐작하기가 그리 수월한 편은 아니라는 게 내 개인적인 소견이다^^) 그 수금원 누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어린 내가 배달일에 선뜻 동참한 것이 내심 기특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조용조용해서인지 모르지겠지만, 내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내가 일을 하면서 서투르게 행동할 때마다 먼저 물어보지 않아도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고, 매번 마주칠 때마다 인사성 밝고 착한 아이라며 칭찬해주기까지 했었다. 하다못해 내가 가게 간판을 잘못 보고서는... 원래 배달지와 비슷한 이름의 엉뚱한 가게에다가 배달을 하는 실수를 해서 한바탕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실수라며 내게 삿대질을 해대는 총무님을 그 누나가 겨겨우 뜯어말려 주었었다. 그리고 총무님한테 혼쭐나고서 한껏 움츠려있던 나 대신 그 원래 배달지 가게에 직접 찾아가 신문을 배달하고 미처 배달 누락된 것을 사과해 준 것도 바로 그 누나였다. 어린 마음에 그런 도움이 참 눈물겹도록 감사했지만, 거기 보답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나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만 내내 가슴 속에 두고 있었다.
12월의 어느 겨울날 밤쯤이었나. 그날도 늦은 배달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뒷정리를 잠깐 한 다음 집으로 가려는데, 지국 사무실 입구에서 그 누나가 막 배달을 마치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누나는 나를 보더니 환하게 화색을 띄면서 반갑게 다가왔다. 그러잖아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너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날 그러니까 12월 24일 저녁에 시간 되니? 예, 별다른 일 없는데요. 그러면 그 날 우리 교회에 초대할테니까 한번 놀러와 볼래?너 교회 한번도 가 본 적 없지?교회 오면 재미난 연극도 보여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깐 꼭 한번 와 봐. 예, 부모님께 교회 놀러가도 되는지 한번 여쭤볼께요. 그래, 그럼 부모님 허락 받으면 나중에 누나한테 미리 알려줘. 며칠 지나지 않아 크리스마스 이브날. 친가, 외가 모두 뿌리부터 불교인 태생이 모태불자 집안인지라 교회에 대해서는 무조건 반감이 있는 부모님이었지만, 성탄절 하루쯤 교회에서 실컷 놀고 선물도 받아오는 것이라면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으셨나 보다. 그래서 아주 쉽사리 허락을 득하여 나는 그 누나가 얘기한 교회로 찾아갔다. 내 발로 처음으로 찾아간 그 교회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그런 작고 아담한 건물의 소형 교회였다. 신기한 것은, 그 누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목사님인지 누구인지 그 정확한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암튼 만나는 모든 아저씨, 아주머니, 형, 누나, 동생뻘 어린아이할 것이 모두가 그 누나처럼 친절하고 따뜻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 을 주제로 한 성극을 맨 처음으로 보았다. 이미 책에서 여러번 읽어서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들뿐이라서 그다지 관심이 끌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의 연극은 내가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세리장 삭개오" 였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온전히 집중하여 매우 주의깊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세리장 신분의 키 작은 삭개오가 예수님이 그 주변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작은 키로 혹시 지나가실 때 제대로 못 뵐까봐서리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얘기가 처음 접하는 나에게는 흠칫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연극 2편을 보고는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잘 차려진 과자들과 과일들을 배불리 먹고나서... 나중에 집에 올 때는 그 누나가 나에게만 따로 챙겨준 "귤 포함 과자 봉지" 까지... 그 누나는 봉지를 쥐어주며 "다음에도 언제든지 교회 또 놀러와" 라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 봉지를 안장 뒤 바구니에 싣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봉지를 어머니 눈앞에 신나게 흔들며 자랑을 했다. 그리고 큰누나와 작은누나와 같이 그 이브날 저녁 너무도 맛있게 귤과 과자들을 먹어치웠던 거 같다. 그 뒤로도 서너번 그 누나가 교회 한번 안 나올래 하고 권했었다. 하지만 행여나 교회를 또 갔다가는 절에 다니는 어머니한테 꼼짝없이 두들겨 맞을 것이 너무도 뻔했기에, 감히 그런 시도조차 다시 해 보지를 못했으리라. 그 누나는 내게 부담을 주기는 싫었는지, 그런 권유를 할 때마다 교회를 못 나간다는 나의 대답에 못내 아쉬워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내가 배달을 그만 둘 때까지 결코 변함없이 항상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대해 주던 그 모습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내가 처음 만난 기독교인 소위 "크리스챤" 사람은 내게 참 선하고 좋은 인상을 강하게 남겼던 것 같다...
[후일담 하나] 그로부터 무려 4년...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1993년, 나의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느 국어시간이었다. 국어선생님이 수업 중에 무슨 주제인가를 설명하시다가 내가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한 얘기를 하시는 것이 아닌가. 분명 들어본 거 같은데... 가물가물 어렴풋이 기억이 날 듯 말 듯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갑자기 "여기 혹시 교회 다니는 사람?기독교인은 이 얘기 다 알던데." 하셨고, 그 많은 학급 친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 학생이 자기가 교인이라고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그 얘기가 뭔지 모른다고 대답했고, 선생님은 약간 실망하신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는 무언가... 아. 저거 내가 아는 얘기다. 아니 내가 봤던 얘기다. 그래, 바로 "삭개오" 얘기다. 나도 모르게 "선생님, 그거 세리장 삭개오 얘기잖아요." 라고 불쑥 입에서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예상치 못한 나의 대답에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는 눈치였다. 자, 그럼 OOO 학생이 일어서서 친구들한테 이 이야기 자세하게 들려주세요. 나는 의기양양하게 내가 연극에서 본 내용들을 되짚어가며 친구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가만히 내 얘기를 다 들으신 선생님의 한 마디. 그러면 OOO 학생도 교회 열심히 다니나 본데 왜 아까 교인 손 들어보라고 할 때 손 안 들고 가만 있었죠?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저 불자인데요??? 교인이라며 자신있게 손든 학생도 모르는 얘기를 자칭 "불자" 인 내가 소상히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국어선생님도 나머지 다른 학급 친구들도 순간 빵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렇게 그날 "기독교에 대해서 무척 잘 알고 있지만 신분은 불자" 인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