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생 42
나는 한때 신문배달소년이었었다... (10)
여전히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아까 얘기했듯이 자전거를 타고 쌩쌩 빠르게 지나 다니지를 못하니 자연 배달시간도 하염없이 보통 오후 3시부터 아무리 늦어야 오후 5시면 끝났어야 하는 배달인데... 신문사 서울본사로부터 지국까지 신문지 뭉치들을 배달하는 큰 탑차가 고속도로 내려오는 길에 눈이 많았는지 그 날 따라 대강 한두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는 통에 신문을 챙겨 지국 사무실을 나선 시간 자체가 이미 한참을 늦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유달리 짧은 겨울 낮시간이라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가고 뉘엇뉘엇 저 너머에 해가 어스름히 지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어둔 저녁길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것도 위험하고, 가끔씩 다른 석간신문 돌리던 불량 중고등학생 형들이라도 만날라치면... 배달하던 신문지 뭉치를 통째로 뺏기는 불상사를 당한 적도 한두번 있었던 지라 나의 마음은 서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정해진 시각에 그러니깐 본인이 생각하는 제시간에 신문이 배달되지 않으면 불 같이 화를 내며 힘없는 나를 타박하는 이상한 발작 버튼을 가진 가게 주인들이 은근히 한두명씩 꼭 있었다. 그 신문 한 부가 도대체 뭐라고. 다른 힘있는 사람들한테는 말 한 마디 큰소리 한 번 못 치는 사람들이, 꼭 나처럼 어리고 볼품없는 사람한테는 막 대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만 같았다. 사회 약자의 슬픔이랄까. 그런 되도 않는 꾸지람과 원성에 조금이라도 눈을 흘기거나 싫은 내색이라도 약간 비칠라치면, 어디서 그런 식으로 배웠냐면서 대뜸 지국 사무실 전화번호를 물어서 지국장님한테... 배달하는 놈들 똑바로 쫌 가르치라고. 이딴 녀석들이 계속 배달하면 다른 신문으로 바꾸든지 아니면 아예 신문 배달 끊어버릴 거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늘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배달소년인 나에게는 그게 바로 가장 무서운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행여나 그런 민원이 들어가는 날에는, 배달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그 무서운 호랑이 총무님이 어김없이 호출을 하곤 했었다. 야, 너 도대체 그 사람한테 어떻게 대했길래 그런 전화가 사무실로 오냐. 너 그러다가 나한테 한번 맞는다. 나는 기술적으로 때리는 걸 옛날부터 배워놔서 얼굴, 목, 팔, 다리 이렇게 눈에 보이는 곳 말고... 배나 등 같은 몸통 위주로 때릴 줄 아는데, 그것도 절대 겉으로는 멍들지 않게 그리고 속으로 골병 들게 때리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거야. 너 특히 조심해. 한번만 더 걸리면 죽어, 알았지? 험상궂은 인상만큼이나 총무님의 살벌한 멘트에 겁이 나서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총무님의 소위 "골병 드는 타격" 을 받기라도 하는 날에는, 나는 겉으로 절대 표가 안 나는 고통 속에 몸부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나를 휘감았다. 그래서 모기 소리만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 절대 없도록 조심할께요.
다시 그 크리스마스 밤 그 시내 한복판. 늘 반갑게 맞아주시는 아저씨가 운영하시는 세탁소 가게로 신문을 들고 들어갔다. 어떤 날은 주인 아저씨가 또 다른 날은 주인 아주머니가 가게를 지키고 계시다가 신문을 수령하시곤 했는데, 오늘따라 아저씨랑 아주머니 두 분이 다 가게에 계셨다. 그 아저씨는 오늘도 똑같이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는 신문지를 건네받으셨다. 그러고는 그 옆에 계시던 아주머니가 이내 의자 옆에서 무언가를 얼른 드시더니 내게 건네주시는 게 아닌가. 작고 하얀 종이가방 속에서 꺼내주신 벙어리 장갑 한 켤레. 너 추운데 장갑도 안 끼고 배달 다니더라. 계속 그러다간 이 겨울에 동상 입는다. 이거라도 끼고 다녀. 포근한 벙어리 장갑 재질만큼이나 온기어린 아주머니의 그 한 마디에 울컥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도 나의 친어머니도 이렇게 따듯하게 말씀해 주신 적이 드문데... 장갑 없이 추운 겨울 내내 배달다니던 내 모습이 몹시도 안타까우셨나 보다. 아직도 배달할 곳들이 한참이나 남아있었기에, 멋적게 꾸벅하고 인사를 드리고는 도망치듯 세탁소를 나섰다. 얼핏 돌아보니 두 분 모두 흐뭇한 미소로 내가 한참을 멀어지도록 쳐다보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 날의 감동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거의 배달이 끝나가는 마지막 무렵에는 백화점 의류코너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있었다. 얼굴도 예쁘고 키도 작고 아담한 의류 판매원 누나였다. 그 아가씨 아니 그 누나도 어린 나이에 배달다니는 내가 기특해 보였는지, 볼 때마다 배달 일 안 힘드냐고 물어봐주고 간간히 사탕이나 껌 같은 군것질꺼리도 한두 개 쥐어주곤 하는 참 선한 사람이었다. 백화점 건물 옆에 바짝 붙여서 자전거를 자물쇠로 잘 잠궈두고... 내가 백화점 4층이었던가 부지런히 걸어올라가 그 의류코너로 걸어갔을 때 웬일인지 그 누나가 보이지를 않았다. 이걸 의류코너 카운터에 맡기고 갈까 아니면 그 누나 올 때까지 잠깐 기다려야 할까... 혹시 오늘 성탄절이라서 그 누나 휴무일일까. 오만 생각이 그 짧은 찰라에 휙휙 지나가는 그 순간,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손을 번쩍 들고 나에게 손짓하는 그 누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그 누나. 얘, 나 너 한참 기다렸는데... 너 오늘은 왜 이리 늦었니. 교통사고라도 났나 걱정했잖아. 이러며 그 누나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예, 오늘은 신문이 지국에 늦게 도착해서 배달을 지금에야 하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나는 웬지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조금 있으면 백화점 문 닫는 시간이잖아. 그러면 이 누나도 퇴근해야 돼서... 내가 너 만나면 꼭 주려고 준비한 게 있는데, 전달 못 하고 퇴근하게 되나 싶어 한참 동안 기다렸지 뭐야. 이제라도 만났으니 참 다행인걸. 활짝 웃으며 그 누나는 준비했던 조그만 선물 상자를 열고 짧고 두툼한 목도리 하나를 꺼냈다. 빨간색 목도리였다. 이내 내 목에 휙 하고 둘러주시더니... 남자 애라서 혹시 안 어울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빨간색도 잘 어울리네. 넌 목이 긴 편이라서 유독 겨울에 다니려면 목 주변이 많이 시릴텐데... 그러다가 목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오늘부터는 이거 꼭 하고 다녀. 특히 저녁에 배달다닐 때!
그 날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더 따스한 장갑 한 켤레의 손길과, 역시 이 세상에서 그 어느 것보다 더 포근한 목도리 한 개의 온정을 단 하루 만에 선물받았다. 그것은 그 뒤로도 한동안 내 손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내 기다란 목을 포근히 감싸주는 수호천사와도 같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힘겨운 배달 일을 이어나가던 내게도, 어려운 역경의 암흑같던 순간 속에 비춰진 희미한 불빛과도 같은 삶의 희망이 비춰지고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