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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생 43

나는 한때 신문배달소년이었었다... (11) 배달졸업

by 특급썰렁이

배달을 졸업하게 되었다. 지난 여름 6월부터 시작한 건데... 한 6개월이나 되었나, 이제는 이 기나긴 여정을 끝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이렇게 계속하다가는 적어도 몇 년 아니 한참이나 긴 세월 동안 벗어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12월도 마지막을 향해가던 어느날 큰맘 먹고 어머니께 가만히 말씀 드렸다. 저 신문배달 그만 둘래요. 벌써 6개월이나 했으면 충분한 거 같아요. 내심 좀더 내가 신문배달 일을 지속하기를 원하셨는지... 어머니는 살짝 서운한 표정과 함께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래, 잘 생각했다. 신문배달 아니면 다른 데 아르바이트 할 때도 없잖아. 새벽 같이 우유배달 다닐 것도 아니고... 이제는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공부나 더 열심히 해라. 어머니는 그렇게 한결 같으셨다. 하긴 나도 어머니에게서 별딸시리 살가운 온기어린 애정의 말 한 마디를 기대했던 건 아니니... 오히려 내가 신문배달 하는 6개월 동안 별말 없이 쭈우욱 지켜보기만 하시던 아버지께 동일한 내용을 말씀 드렸을 때의 반응은, 어머니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는 딱 한 마디만 하셨다. 네가 힘들면 당연히 그만 둬야지. 오늘이라도 당장 안 하겠다고 말하고 온나. 그게 아버지가... 차마 내게 바로 얘기하지는 못하고... 무려 6개월 동안이나 가슴속에 품고 계셨던 그거였으리라.

서둘러 집을 나서서 지국 사무실로 향했다. 평소에 사무실에 나가는 때보다 30분은 더 이른 시각이었다. 뭐라고 얘기를 꺼내면 좋을까. 자칫 어버버 더듬더듬 말하다가는 오늘 못 그만 둘 수도 있을텐데...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해가며 고민과 싸우다 보니 어느새 사무실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항상 일찍 나오셔서 본사로부터 내려오는 탑차 트럭을 기다리시던 지국장님이 혼자 사무실에 앉아 계셨다. 데스크에서 오늘 신문지 사이에 끼워넣을 전단지가 몇 종류나 되는지 체크하고 계시던 지국장님이 나를 뒤늦게 발견하시고는... 너 오늘은 왜 이리 일찍 왔어? 탑차 도착하려면 한참 멀었는데. 오늘 좀 늦는다고 전화 왔더라. 그러시고는 어쩔 줄 몰라 사무실 문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왜 뭔일 있어?아니요, 그게 아니라...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아무리 고심해 보아도 할 말이 못다 정리되었던 것이다. 너 무슨 할 말 있는거제?눈치 빠르게 무언가 이상하다고 알아채린 지국장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너 이리 잠깐 앉아봐라. 할아버지 뻘 되는 지국장님이라서 그런지, 지국장님 바로 앞에 의자를 가져다가 앉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국장님, 저 드릴 말씀 있는데요. 인자는 신문 배달 그만 두면 안될까요? 내 대답을 예상한 듯 지국장님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끄덕거리시는 거 같았다. 그래, 너도 배달 시작한 지 제법 됐제?그 정도 하면 많이 한 거다. 너보다도 훨씬 빨리 그만 둔 애들도 많은데 뭘. 저번에 너랑 같이 시작한 네 친구처럼... 그러면 있다가 총무 도착하면 한번 얘기해 봐라. 다행이다. 일단 지국장님 선에서는 오케이 사인을 받은 듯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에게는 "총무님" 이라는 넘어야 할 제일 크고 부담스러운 산이 남아 있었다. 베이스캠프에서 최종 정복을 향해 정상에 도전하는 산악인들의 마음이 감히 이런 것과 비슷하리라. 그날따라 너무 무섭고 떨리는 마음에 가만히 앉아서 총무님을 기다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 배달이라는 오늘의 임무를 완수해야 하였기에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여느 때처럼 신문지 사이에 하나하나 전단지들을 끼워나가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간이 한참은 남은 거 같아서, 내가 오늘 배달할 신문지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배달할 분량까지 전단지를 끼워넣고 또 끼워넣었다. 잠시 후 드디어 총무님이 출근하셨다. 저... 저 총무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지라 척 하면 바로 알아채리는 소위 빠꾸미였던 총무님은, 나와 오늘 마주치는 순간부터 "요 녀석 오늘 심상찮은데..." 하는 눈치가 번뜩 든 모양이었다. 니 그만 둘라고 그러는거지?역시나 내 맘 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게 맞았다. 죄송합니다. 저 오늘만 돌리고 그만 하려구요... 왜였을까. 죄송하다는 소리부터 입 밖에 나왔다. 총무님이 나에게는 그렇게 무서운 존재였나 보다. 너 이 자슥, 내가 저번에 뭐라하든. 내 말 안 들으면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안 그러더나? 가뜩이나 배달할 데는 많고 배달할 놈들은 부족해서 나까지 매일 배달한다고 난린데... 너가 이렇게 갑자기 그만 두면 네가 배달하던 구역은 누가 맡으라고? 10여분은 족히 이런 하소연 아니 잔소리가 쏟아졌다. 아, 진짜 그만 둘 수는 없는건가.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한참 동안을 넋두리마냥 늘어놓던 총무님은 갑작스레 말을 멈추더니 나를 위아래로 한번 쭉 훑어 봤다. 할 수 없지 뭐. 본인이 더이상 하기 싫다는데... 그나마 네가 크게 사고 치는 거 없이 성실히 일하는 편이라서 네 봐주는 거다. 오랜만에 일 열심히 잘 하는 놈 왔나 싶어서 오래오래 붙잡아놓고 계속 배달시킬려고 했더니만... 원래는 그만두는 자기 대신해서 배달할 사람 한 명 붙잡아 온 다음에 그 때 그만 둘 수가 있는건데... 네 대신 배달할 놈 어디 한 명 데려올래? 아뇨, 제 주변에는 그럴만한 친구는 없는데요... 총무님의 성화에 진짜 쥐새끼처럼 쪼그라든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총무님은 또다시 머리를 쥐어잡고 고심에 고심을 하더니 이렇게 퉁명스러운 한 마디를 내던졌다. 그럼, 오늘까지만 하고 그만 둬라. 어, 이렇게 쉽게 허락한다고...?하지만 총무님은 마지막으로 나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섬찟한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너 이 동네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네 눈에 띄였다가는 뼈도 못 추릴끼라. 나는 배달하다가 그만 둔 놈들은 사람 취급 안하거든..."

그렇게 나는 그날 이후로 신문 배달을 그만두었다. 총무님의 마지막 말이 너무너무 무서워서, 마지막 달 월급 받으러 지국 사무실에 찾아갈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대신 아버지가 밀린 월급을 정산받아 오시는 것으로 나와 그 지국 사무실의 인연은 끝이 났다. 그러고도 한 3개월 이상은 진짜 그 지국 사무실 근처는 고사하고 자전거로 30분 거리 이내 반경으로는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길기도 길지만 결코 쉽지 않았던 나의 "신문배달소년" 경험은 또 하나의 추억 아니 기억 속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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