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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생 41

나는 한때 신문배달소년이었었다... (9)

by 특급썰렁이

그 다음날... 그러니까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1989년 그 해 성탄절이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시내에 쭈욱 연달아 있는 배달지들을 하나하나 바지런히 배달해 나갔다. 크리스마스라곤 생전에 눈 소식이라고는 단 한번도 없던 경주에 그날따라 살짝 짓눈개비가 흩날리는 것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알싸하게 추위가 스며드는 그런 차디찬 날씨였다. 장갑 같은 거라도 끼고 집을 나왔어야 했지만, 신문지들 뭉치에서 한 부씩 가려내려면은 장갑 낀 손이 둔해서 거추장스럽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조금씩 빨갛게 얼얼해져가는 손을 수시로 호호후후 불어가면서... 정히 못 견디겠다 싶으면, 얄팍한 상의 호주머니와 바지 호주머니를에 두손을 번갈아 넣었다 뺏다 해 가면서 배달은 계속되었다. 미 1주일 전부터 크리스마스 시즌에 한몫 보려는 듯... 백화점이고 옷 가게들이고 화장품 가게고 뭐고 너나할것 없이... 크리스마스 트리에 화려한 전등 장식에 들썩들썩 잔뜩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모양새였다. 그래서인지 그 성탄절 늦은 오후 벌써부터 시내에는 많은 사람들로 혼잡해지기 시작했다. 찻길에서 자전거 타고 다니기가 도저히 힘들 정도로 붐비기 시작해진 터라, 급기야 나는 재빨리 자전거에서 내려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게 되면서, 내 양손도 얇은 바지로 간신히 덮여있는 양다리도 시려져만 갔다. 그런 다소 초라한 몰골로 길 모퉁이를 도는데, 같은 학급 친구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양손에는 각각 커다란 장난감 상자를 들고서. 그 옆에는 그 친구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보이는 분들이 계셨는데, 아버지는 케이크를 어머니는 뭔지 모르는 백화점 쇼핑백 꾸러미를 들고 따라가고 있었다. 혹시나 그 친구가 내가 누군지를 알아챌새라 황급히 몸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비틀었다. 다행히 그 친구는 나를 못 본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가려는 방향 쪽에서 이리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뒤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협소한 상황이었고, 중간에 어디 다른 쪽으로 빠져나갈 샛길조차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원래 가려던 방향 그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행여나 그 친구가 뒤늦게라도 알아볼까 싶어... 나는 고개를,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아래로 수그리고 옷섶에다가 푹 숙여버렸다. 아. 다행이다. 그 친구는 아버지, 어머니와 쉴새 없이 얘기하며 웃음 짓느라 바로 코 앞으로 지나가던 나를 못 본 모양이었다. 그 친구에게 안 들켜서 천만다행이다라는 안도와 함께 씁쓸한 생각이 밀려왔다. 뭐 내가 부끄러운 행동이나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 친구 앞에서 나를 감추고야 말았지?그런 내가 한심스럽다는 생각도 잠시... 웬지 오늘 같은 날 그 친구뿐 아니라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특히 아버지, 어머니들이 아들 딸 손을 잡고 시내에 나와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백화점 같은 데서 선물도 사고 함께 웃고 즐기고 있는데... 나는 이게 진짜 뭐람. 가족들과 혹은 친구들과 이리저리 시내 곳곳을 놀러다니고 있어도 시원찮을 나이에, 돈 한 푼 더 벌어보겠다고 학교 마치고 신문배달이나 하고 있으니... 나도 그 친구처럼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돈 벌러 다녀야만 할 정도로 못 살지는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긴 오늘도 오늘 같은 성탄절 공휴일에도 아버지는 어김없이 아침부터 일찌기 일하러 나가셨고, 어머니는 장사가 잘 되지도 않는 슈퍼마켓 샷다를 새벽부터 밀어올리고 밤늦게까지 카운터를 지키고 계셨으니... 못 살지 않았으면 정말 좋겠다는 나의 그 소박한 희망은 앞으로도 가까운 장래에는 결코 쉽게 바뀌지는 않으리라. 라도 이렇게 학교 마치면 곧장 일하러 나오니 돈 쓸 시간도 없고 또 신문배달해서 한 달에 단 3만원이라도 보태면 가계에 미미하게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나의 신문배달은 쉽사리 그만 둘 수 없는 나만의 이유 속에서 계속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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