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장날에 간 적이 있었다. 난생 처음 간 그곳은 뭐랄까 그냥 동네 장이 선 건데, 1주일에 두 번 서는 그런 5일장의 개념이 아니라 노상 펼쳐놓는 상설 시장이라서 그런지 엄청 새롭거나 신박한 시장은 아니었던 거 같다. 암튼 경주의 어느 이름모를 시장이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걸어다니며 이리저리 두리번두리번 장 구경을 하고 있노라니 세상 모든 게 신기하고 또 궁금스러웠다. 이맘때쯤이면 아버지가 무언가를 하나 사줄만도 한데, 워낙 없이 자란데다가 살가운 사랑도 못 받고 자란 불쌍한 막내였던 아버지로서는 그러한 애정 따위는 그 인생에 흔적조차 없었었다. 그래서 적어도 1시간 가량 두 부자는 넓다란 장 마당을 그저 걷고 또 걷기만 했을 뿐이다. 한참을 걸어가다가 아버지가 불현듯 멈춰선다. 카세트테이프들이 하나 가득 실려있는 리어카였다. 80년대 초였으면 아버지 나이가 기껏해야 30대 초반이었는데, 아버지는 뽕짝을 참 좋아하셨던 거 같다. KOS 1TV의 가요무O... 그 무렵 아버지는 복싱대회, 씨름대회, 가요무O은 빼놓지 않고 보셨다. 아버지의 애창곡은 울고 넘는 박달재. 지게지기 싫어서 일찌기 가출한 아버지는 담배는 잘 태우셨지만 술은 단 한 잔도 못하셨다. 거북선, 태양, 장미, 팔팔, 디스, 내가 심부름으로 사다나른 담배 종류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맞닿아 있을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했다. 신기했다. 왜 술은 배우지 못하셨을까. 안 배우신건지 못 배우신건지. 암튼 술만큼은 젬병이셨다. 국민학교 2학년 때였나 아버지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적이 딱 한번 있었다. 저기 저 너머 동네 입구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아버지였다. 평상시에는 말수도 별로 없으신 분이 그날따라 동네가 떠나가라 뭐라뭐라 하셨는데 아마 노래를 부르신 것이리라. 무슨 노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빨갛게 취기가 오른 아버지는 맨날 보아오던 나의 아버지 그 분이 아니었다. 그냥 취한 아버지였다. 한참을 노래부르다가 좁은 안방에 몸을 누이고는 이내 잠드셨다. 그게 아버지다. 술도 못 마시는 촌스럽고 처량한 가난한 가장이다. 어디 가서 싫은 소리도 못 하는 바보 같은 아버지다. 남들은 사람 좋다 말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이 사달라는 장난감 하나 못 사 주는 못난 아버지였다. 하루는 철없는 내가 어린이날에 선물 안 사주냐고 하루 종일 징징거린 적이 있다. 웬종일 아버지 어머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마징가 제트인가 로보트 태권브이인가 진짜 쪼매난 로봇 장난감 하나 사주면 안 되냐고 귀찮게 해댔나 보다. 그렇게 보채다가 결국 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치민 어머니한테 직살나게 두들겨맞고 슬프고 원통해서 울다가 잠들었다. 한참을 눈물 젖은 베개를 베며 자고 있는데, 일 마치고 아주아주 늦은 시각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나를 부산스럽게 깨우기 시작했다. 아버지 손에는 생뚱맞게도 권투 글러브 한 쌍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일평생 권투 글러브 사달라고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 심지어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허약 체질에 약골이라서,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에 있는 약 없는 약 이것저것 먹어왔던 극단적으로 내향적이고 수동적이고 정적인 어린이였는데... 아버지는 물색없이 비싼 로봇 사달라는 그 막내아들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어디서 사 오신건지 아니면 길 가다가 구해오신 것인지 예기치도 않던 권투 글러브는 그 밤에 어떻게 가져오게 되신건지... 그날로부터 한참 동안을 나는 그 권투 글러브를 가지고 놀았다. 비록 내가 그렇게 갖고 놀고 싶었던 그 로봇 장난감은 아니었지만, 나는 뭐 다른 불평 불만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괜히 궁시러댔다가는 그나마 어렵사리 받은 그 글러브조차도 더이상 내것이 아니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봇 장난감이 갖고 싶었다. 그로부터 적어도 40년은 족히 지난 지금 이 순간도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그 흔한 로봇 장난감 하나 사 본 적이 없다. 나의 아버지가 사 주시는 로봇 장난감이 꼭 갖고 싶어지는 토요일 아침이다. 다시 카세트 테이프 얘기로 돌아가서... 아버지는 유행 원티어였던 "트롯 메들리" 테이프 한 개를 아버지 당신 자신을 위하여 큰맘 먹고 구입하셨다. 돈 안 되는 거 샀다고 어머니한테 쾌 오랜 잔소리를 들으실 각오를 단단히 하신 듯 자못 의미심장한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의 장하고 용기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테이프 하나 골라 보라고 권하셨다. 리어카 아저씨가 최신 유행이라는 아동용 테이프 몇 개를 보여주셨다. 뭐 동요도 있고 TV 만화영화 주제가도 있고 그랬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끝에 그 중에서 하나를 꺼내들었다. 황금박쥐, 요괴인간, 원탁의 기사, 그랜다이져, 짱가, 마린보이, 독수리 5형제, 로보트 태권브이, 마징가 Z, 캔디, 플란더스의 개, 은하철도 999, 돌아온 아톰... 너무 많아서 그 목록을 일일히 다 거론하기도 힘든 그 수많은 만화영화 주제가들... 거기에서 인기있는 곡들만 추려내서 단 하나의 카셋트 테이프에 모조리 몽땅 다 수록했다 아니가. 천하를 다 가진 징기츠칸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나는 너무도 감격에 북받쳐 한동안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 때 테이프를 사 주신 아버지한테 감사하다는 말도 못했다. 참고로, 아버지가 사신 트롯 메들리 테이프는 어머니에게만큼 비밀로 남겨졌다. 어쩌면 내게 덤으로 사 주신 그 만화영화 테이프는 비밀에 대한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그 귀하디 귀한 만화영화 테이프를 손에 꼭 쥐고 집에 돌아갔더니, "왜 돈 안 되는 아들 테이프에다가 쓸데없이 돈 썼냐" 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어김없이 쏟아졌다. 괜시리 눈치를 보며 나는 방 한 구석에 조용이 틀어박혀 카세트를 틀었고 만화영화 주제가를 백번이고 천번이고 외워 불렀다. 내일 학교 가면 옆짝 친구한테 제일 먼저 자랑해야지. 사랑을 받아본 적도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도 배워본 적 없는 경상도식 아버지의 속마음은 그 날 그 카세트 테이프와 함께 내 마음 저쪽 한구석에 남아있다. 신기하게도 그 날 내가 테이프로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은 아마도 은하철도 999였을텐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트로트 애창곡은 그 날 그 사건 이후로 아버지의 18번인 "울고 넘는 박달재" 가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버지 그 때의 그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계신다. 예전에는 한 잔도 제깍 못 드시던 분이 이제는 소주 한 병도 거뜬히 드신단다. 여전히 담배를 피워대시고 여전히 무뚝뚝하시단다. 아마 그러실 것이다. 1948년에 태어났지만 1958년에야 소학교 들어간 뒤에 비로소 출생신고된 그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