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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특급썰렁이 Aug 17. 2024

나의 일생 10

나의 오줌싸개 이야기

나는 국민학교 시절에 여러 번 오줌을 싼 것 같다. 그것도 학교에서 오줌을 쌌다. 어디 가든 그런 사람은 꼭 있는 거 같다. 어느 사회, 어느 그룹, 어느 집단에서도 꼭 그런 사람이 있는 거 아닌가. 국내 최일류 S대에 꼴찌가 있고 열등생이 있기 마련이니까. 내가 오줌을 싸는 것은, 어떤 질병이 있거나 어떤 비뇨기계 장애 혹은 배변장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내성적인 내 성격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 시절 국민학교 수업시간 중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꽤나 큰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선 선생님이 한창 칠판 판서에 열중하시거나 교과서 설명에 열을 내고 계실 때 그 흐름을 싹둑 자를 정도로 힘차게 오른팔을 번쩍 들어올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다음 갑작스런 오른팔 들기에 의아해 하시는 선생님의 두 눈을 또렷이 바라볼 수 있는 두번째 용기가 따라와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손을 든 용건을 신속 정확하게 선생님께 의사전달하리라는 다짐을 동반한 용기로 마무리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중에서도 단 1단계조차 나아가지 못한다는 아주 큰 단점의 소유자였다. 하긴 선생님  질문하시고 정답 아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셔도... 아는 사람은 상품까지 준다고 하셔도... 오른팔을 차마 들지 못해서 상품 구경조차 못 해 본 적이 여러번 하고도 또 여러번... 나는 그렇게도 세상 모든 면에서 극내성적, 수동적, 비적극적인 학생이었다. 요즘 말로치면 자폐증에 가까웠다고 할까. 국민학교 교실마다 선생님 출입전용의 앞문과 학생들이 주로 쓰던 뒷문이 있고, 그 뒷문 바로 옆에는 조그마한 거울이 벽에 붙어 있었다. 나는 좀처럼 그 거울을 직접적으로 바라보지를 못했던 거 같다.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친히 제공했던 그 왕비가 그랬듯이, 거울 앞에서 당당하게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까. 나는 그 거울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웠었다. 그 거울 속에서 초라한 내 모습을 발견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나 보다.


나는 슬펐다. 이발소에서 매달 깎는 이발비도 아깝다는 어머니의 등쌀에 어느새 덥수룩히 어깨 무렵까지 한없이 길어져버린 내 머리카락이 싫었다. 별로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그냥 버리기 아깝다면서 누나로부터 물려입게 된 그 체크무늬 빨간 남방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역시 똑같은 이유로 이제는 내 것이 되어버린 꽃무늬 내복이 못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일년에 한 번 학년초마다 실시하는 신체검사. 때로는 체육관으로 가기도 하지만, 담임선생님이 직접 키 재기 포함된 체중계와 줄자를 가져오셔서 학급에서 시행되던 그 신체검사가 그래서 싫었다. 왜냐면 가끔씩 정확한 체중측정을 한답시고 속옷만 입고 신체검사 하자는 이상한 취향의 선생님도 있었으니까. 암튼 그럴 때마다 나의 꽃무늬 내복은 신체검사 이후로도 한동안 친구들에게 적잖은 놀림감이 되기에 필요충분 조건을 듬뿍 가지고 있었기에 말이다. 구멍난 양말도 내가 직접 반짓고리를 가지고 꿰메서 신고. 얼마나 싼 걸 사와길래 구입한 지 불과 몇 달도 채 안 되어서 이내 옆풀떼기가 찢어져 버리는 그 싸디싼 아티스 운동화도 챙피했다. 나중에는 그나마도 비싸다고 새로 안 사 주신 덕분에, 내 운동화 발 사이즈는 중 2 이후부터 평생을 265라는 숫자에 멈추게 만들었다. 나는 가난한 집안 형편 수준으로 자존감마저 땅바닥을 맴돌고 있었다.

   

처음 학교에서 오줌 싼 날은, 아까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 다녀오느라 미처 화장실 다녀올 시간을 놓쳤던 그 날이었다. 막 학교입학한 새내기 1학년 8살의 나는, 한번 참아볼 요량으로 어린 마음에 애처롭게 몸을 이리 꼬고 저리 꼬고 용을 써 봤다. 하지만 학기초부터 수업시간에 똑바로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지 못하면 또 야단맞기 십상이었기에 이내 포기할 수밖에. 조금만 더 참으면 쉬는시간 종이 울리겠지. 하지만 학교 소사 아저씨가 종 치는 걸 까먹으셨는지... 그날따라 종소리는 아득한 개마고원 너머 하말라야 산맥 꼭대기에서 울리는 메아리 소리마냥 멀게만 느껴졌다. 종소리와 동시에 의자 밑으로 쏟아내리는 내 오줌을 보고는 옆짝 여자아이가 기겁을 하는 소리에 나는 입학 최초의 공식 오줌싸개로 등극하고야 말았다.   


두번째는 의외의 시간에 의외의 장소였다. 그날은 조회시간도 잘 넘어가고 쉬는 시간에는 필요할 때마다 적절히 화장실 다녀와서 하루종일 온전히 깔끔하게 마쳐지는가 싶었다. 근데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시는 순간부터 무언가 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그다지 말씀도 없으시던 분이 그날따라 뭐 그리 전달사항이 많으셨는지... 말씀이 자꾸 길어지고... 눈치없이 친구들은 해맑게 질문들을 쏟아내고... 괴롭고 힘든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내 어린 육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종례 마치고 곧장 화장실로 가면 될 것을. 수업 마치면 다른 길로 새지 말고 곧장 집에 가야한다는 선생님의 훈화 말씀에, 나는 꽉찬 방광을 붙들고 어느새 실내화를 갈아 신고 있었다. 또 오줌을 싸고 말았다. 실내화 신다말고 오줌을 싼다는 것은 어린 내게 서럽고도 치욕적인 기억이었다.

   

[후일담이지만... 국민학교 저학년 어렸을 때는 오줌 누는 꿈을 자주 꾸고 자주 오줌을 쌌다. 집에 세탁기도 짤순이도 없는데 매번 이불 빨기가 귀찮고 짜증났던 어머니는 급기야 오줌 싼 이불을 빨랫줄에 하루 널어놨다가 밤이 되면 그 이불 그대로 나를 덮이셨다. 오죽하면 그러셨을까. 근데 그 다음날도 보란듯이 또다시 거기에다 오줌을 쌌다. 결국에는 크게 혼나고 속옷 바람에 집 밖으로 쫓겨났다. 그 시절 중소도시라서 흔치않던 키를 구해 오셔서는 소금 얻어오라고 쫓아내셨다. 작다면 작은 소도시에서 그 뻔하고 쪼그만 동네방네 온통 소문이 났다. 지난번 얘기처럼 불장난을 하도 하고 다녀서 오줌싸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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